1998년 가을>
.........96년에 본 일리야레핀전은 놀라웠다. 모든 현대적인 작업들이 순식간에 시시한 장난쯤으로 여겨졌다. 그는 그만큼 진지하고 당당했다. 마치 도스토예프스키처럼. (그렇다. 무시무시한 절규의 빛을 뿜어내는 황녀의 눈빛이나 볼가강 인부의 처참한 표정은 분명히 러시아 문학가들의 비장한 진실미와 상통했다.) 레핀은 감정을 묘사하여 그것을 보는 이들의 가슴에 불러일으킬 줄 알았다. 그는 감정에 취해 붓을 휘두르지 않았다. 미칠듯한 감정적 폭풍이 내재된 황녀의 눈빛은, 평화로운 숲속에 누운 톨스토이의 옷자락과 조금도 다를 것없이 치밀하고 냉정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얄미울 정도의 위대함, 대가다운 능숙함이 드러나 있었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화면을 창조하는 것과, 화가 자신이 감정에 취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화가는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을 만큼 강해야 한다. 그는 창조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표현주의적인 격렬한 붓자국의 정서적인 가치를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주의해야 할 사항이다.)
레핀은 본질적으로 19세기적인 그림을 그렸다. 19세기 그림을 가까이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그림 자체보다는 이미지를 중시했던 것 같았다. 레핀은 세부 묘사를 하느라 색깔이 더러워지거나 붓질이 조잡해지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이런 부분은 가까이서 보면 아주 지저분하고 조악해 보인다. 마치 두껍게 화장한 여자의 가까이서 본 얼굴처럼...... 그러나 멀리서 보면 이 붓질은 분명한 효과를 거둔다. (사진으로 찍으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 경우 화가는 색채로서의 그림 자체의 미감보다는 이미지의 확실성을 택한 것이다. -쿠르베도 같은 방식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화가의 19세기적인 점인데, 극단적인 반대로 세잔의 경우 그림의 모든 부분이 산뜻한 색채로 평등한 조화를 이루며 덮혀 있지만, 이미지는 거의 해체되는 것이다.)
......................................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희망이기 때문이다.
예술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 두가지는 기적과 같다.
삶과 세상은 이토록 차가운 것이기에-.
눈부시도록 아름답지만 그 두가지는 봄날 한때 흩날리는 꽃가루와도 같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존재를 믿고 그리워할 것이다.
그것이 늘 함께 해주지 않는다 하여, 생의 어둠을 진실이라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스쳐가 버리는 진실에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용기-.
그것이 다가와 눈부시게 피어났을 때 뿐 아니라 눈앞에서 영영 사라졌을 때에도 믿을 수 있는 용기-.
일시적으로밖에 느낄 수 없는 우리 하찮은 미물의 감각을 부정하며, 의연히 영원할 그 세계를 동경하며........ 나는 놀라고, 신비로워 하며, 스스로의 존재에 씁쓸한 웃음을 머금듯이, 머나먼 푸른 해원을 바라보듯이 그 세계를 바라본다. 겸손히, 뜨거운 용기를 가지고, 인내와 체념과 굴하지 않는 열정을 함께 가지고 걸어가겠다. 마치 도달하지 못하는 먼 곳으로 나아가는 배처럼 담담히 견디고 희망을 가지며.......
...........때론 삶이 무섭게 느껴지는 순간이 닥치더라도 의연히 용기를 내야 한다. 삶은 희망을 갖는 것이다.
E씨는 이 말에 반발할 것이다. 오늘 그 사람의 단편 하나를 읽었다. 도마뱀 껍질처럼 차디찬 단편을. 생에 대한 환상이라면 실오라기 하나라도 걷어치우겠다고 작정을 한. -이번 소설에서 그는 연애감정이라는 것을 멋지게 해부, 난도질해 보였다. 삶은 고깃덩이처럼 차디차게 내장을 드러냈다. 씁쓸한 것은 그게 진실(전부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진실에 속하는)이라는 점이었다.
당신은 너무 맹목적이야.
좀더 따뜻한 피를 가질 순 없을까. 그럴순 없을까. 당신이 증오하는, 인간들의 그 바보스러운 희망에 대한 애착을 좀더 너그럽게 보아 줄 순 없었을까.
어차피 삶이란 알면서도 속아주는 거야.
바닥까지 파헤칠 수 있는 건 바보 아니면 밑바닥에 뭔가가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자 뿐이야.
이봐, 우리는 한번 신을 믿어보는 거야.
알면서도 믿고, 알면서도 사랑하고, 알면서도 희망을 가져보는 거야.
누가 알겠어? 1%의 가능성도 너무나 뿌듯하게 커. 희망을 먹여살리는 데는 그 천분의 일로도 충분해.
그게 바보같은 일일까?
나라면 사랑하는 쪽을 택하겠어.
그래, 속는 셈치고, 다시 한번 더 속는 셈치고 믿는 쪽을 택하겠어.
.....................................................
.........작은 행복.
저녁 별이 빛나는 도시 변두리, 불 켜진 지붕 밑 방에서 그는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며 살았다. 습습한 거리와 재래식 시장의 냄새와, 새벽 일에 지친 사람들의 때묻은 옷자락에 스치고 부대끼며, 그는 살았다. 자신의 세계를 그는 사랑하였다. 선술집의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 가득 찬 김치찌개 냄새 같은 것을, 여인숙 방이나 낡은 버스 터미널에 스민 바람 냄새 같은 것을 그는 사랑하였다. 김오르는 군밤 난로 곁에 쭈그리고 앉은 할머니의 찌든 얼굴 같은 것을 사랑하였다. 쓸쓸한 초겨울 거리에 흩날리는 바싹 마른 낙엽 같은 것을 사랑하였고, 하얀 눈의 역설적인 따스함을 사랑하였다. 그 차가운 따스함에 어린 가슴 아픈 추억처럼 겨울을 사랑하였고, 회색 도시의 무덤덤함을 사랑하였다. -그렇게 살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하지만 쓸쓸해 하고 슬퍼하고 아파하며 살았다. 작은 행복. 얼어붙은 잿빛 거리를 그는 촘촘히 걷는다. 매일매일 작업하고 시를 쓰며, 조그만 지붕 밑 방에서 다시 혼자가 되기 위해. 그의 방은 따스할 것이다. 전기난로 하나로 만족할 것이다. 창문을 열면 별이 보일 것이다. 펼쳐진 지붕들 아래로 불빛들이 보일 것이다. 그 안에는 사람들이,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는 위안받을 것이다. 마음 뿌듯하게 커피를 마시며 혼자가 아닌 듯 가슴 훈훈할 것이다. 조그만 턴테이블에 낡은 LP로 음악을 들으며, 그는 만족하여 다시 붓을 들 것이다. 작은 행복. 몇 권의 그가 사랑하는 책- 자주 읽어 겉표지가 닳은 그 책들을 쓰다듬으며, 심지어 마음 아플 때에도 따사로울 것이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그는 다시 그리고 쓸 것이다. 끝없이 그렇게 할 것이다. 그래서 힘겨운 그의 수레바퀴를 굴려 갈 것이다. 만족하고 감사하며 기꺼이 그 길을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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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적인 세계를 알고 있다. 그것은 내가 바라보고 내 속에서 어떤 이미지를 머금게 된 세계이다. 세상이란 곳은 감상적이리만큼 시적이었다. 안타깝고, 아름다우며, 시정에 흠뻑 젖어있는 세계였다. 늘 감탄하면서, 놀라고, 애증을 느끼면서, 그 세상을 바라보았다......
세계, 그리고 그 세계를 사는 사람들을.
나는 알고 있다. 이것만이, 오직 이것만이 나의 '무엇'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다. 나는 언제나 강박관념처럼 이 주제로 돌아올 것이다. 그건 내가 작업가가 된 근원적인 동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걸 구현해 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도 내 머릿속에 안타깝게 떠오르며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그것은 추상적인 음계라든가 뒤섞인 색채의 이미지가 아니다.
지울 수 없는 추억처럼 담담히 펼쳐진 채 흘러가는 이 세계, 한없는 시정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너무나 차갑고 잔인한 이 세계, 그리고 이 세계 안에 안겨 발버둥치며, 한때의 추억같은 일시적인 생에 잠깐 초대받은 인간의 무리.
그것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아니 그리든 쓰든, 어떻게든 만들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느끼는 바 대로, 왜냐면 어디에도 내가 느끼는 것과 같이 느끼게 하는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나 혼자 그것을 바라보고 느끼고, 그냥 내 삶과 함께 그것이 사라져 버린다 해도, 사실은 조금도 상관없는 일일 텐데, 나는 견딜 수 없었다. 토해내어 만져볼 수 있는 어떤 덩어리로 구현해 놓기 전에는, 언제나 이 초조와 안타까움에 쫓겨야 할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하듯이 혼자 간직하고 잊어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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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에 본 일리야레핀전은 놀라웠다. 모든 현대적인 작업들이 순식간에 시시한 장난쯤으로 여겨졌다. 그는 그만큼 진지하고 당당했다. 마치 도스토예프스키처럼. (그렇다. 무시무시한 절규의 빛을 뿜어내는 황녀의 눈빛이나 볼가강 인부의 처참한 표정은 분명히 러시아 문학가들의 비장한 진실미와 상통했다.) 레핀은 감정을 묘사하여 그것을 보는 이들의 가슴에 불러일으킬 줄 알았다. 그는 감정에 취해 붓을 휘두르지 않았다. 미칠듯한 감정적 폭풍이 내재된 황녀의 눈빛은, 평화로운 숲속에 누운 톨스토이의 옷자락과 조금도 다를 것없이 치밀하고 냉정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얄미울 정도의 위대함, 대가다운 능숙함이 드러나 있었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화면을 창조하는 것과, 화가 자신이 감정에 취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화가는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을 만큼 강해야 한다. 그는 창조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표현주의적인 격렬한 붓자국의 정서적인 가치를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주의해야 할 사항이다.)
레핀은 본질적으로 19세기적인 그림을 그렸다. 19세기 그림을 가까이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그림 자체보다는 이미지를 중시했던 것 같았다. 레핀은 세부 묘사를 하느라 색깔이 더러워지거나 붓질이 조잡해지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이런 부분은 가까이서 보면 아주 지저분하고 조악해 보인다. 마치 두껍게 화장한 여자의 가까이서 본 얼굴처럼...... 그러나 멀리서 보면 이 붓질은 분명한 효과를 거둔다. (사진으로 찍으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 경우 화가는 색채로서의 그림 자체의 미감보다는 이미지의 확실성을 택한 것이다. -쿠르베도 같은 방식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화가의 19세기적인 점인데, 극단적인 반대로 세잔의 경우 그림의 모든 부분이 산뜻한 색채로 평등한 조화를 이루며 덮혀 있지만, 이미지는 거의 해체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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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희망이기 때문이다.
예술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 두가지는 기적과 같다.
삶과 세상은 이토록 차가운 것이기에-.
눈부시도록 아름답지만 그 두가지는 봄날 한때 흩날리는 꽃가루와도 같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존재를 믿고 그리워할 것이다.
그것이 늘 함께 해주지 않는다 하여, 생의 어둠을 진실이라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스쳐가 버리는 진실에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용기-.
그것이 다가와 눈부시게 피어났을 때 뿐 아니라 눈앞에서 영영 사라졌을 때에도 믿을 수 있는 용기-.
일시적으로밖에 느낄 수 없는 우리 하찮은 미물의 감각을 부정하며, 의연히 영원할 그 세계를 동경하며........ 나는 놀라고, 신비로워 하며, 스스로의 존재에 씁쓸한 웃음을 머금듯이, 머나먼 푸른 해원을 바라보듯이 그 세계를 바라본다. 겸손히, 뜨거운 용기를 가지고, 인내와 체념과 굴하지 않는 열정을 함께 가지고 걸어가겠다. 마치 도달하지 못하는 먼 곳으로 나아가는 배처럼 담담히 견디고 희망을 가지며.......
...........때론 삶이 무섭게 느껴지는 순간이 닥치더라도 의연히 용기를 내야 한다. 삶은 희망을 갖는 것이다.
E씨는 이 말에 반발할 것이다. 오늘 그 사람의 단편 하나를 읽었다. 도마뱀 껍질처럼 차디찬 단편을. 생에 대한 환상이라면 실오라기 하나라도 걷어치우겠다고 작정을 한. -이번 소설에서 그는 연애감정이라는 것을 멋지게 해부, 난도질해 보였다. 삶은 고깃덩이처럼 차디차게 내장을 드러냈다. 씁쓸한 것은 그게 진실(전부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진실에 속하는)이라는 점이었다.
당신은 너무 맹목적이야.
좀더 따뜻한 피를 가질 순 없을까. 그럴순 없을까. 당신이 증오하는, 인간들의 그 바보스러운 희망에 대한 애착을 좀더 너그럽게 보아 줄 순 없었을까.
어차피 삶이란 알면서도 속아주는 거야.
바닥까지 파헤칠 수 있는 건 바보 아니면 밑바닥에 뭔가가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자 뿐이야.
이봐, 우리는 한번 신을 믿어보는 거야.
알면서도 믿고, 알면서도 사랑하고, 알면서도 희망을 가져보는 거야.
누가 알겠어? 1%의 가능성도 너무나 뿌듯하게 커. 희망을 먹여살리는 데는 그 천분의 일로도 충분해.
그게 바보같은 일일까?
나라면 사랑하는 쪽을 택하겠어.
그래, 속는 셈치고, 다시 한번 더 속는 셈치고 믿는 쪽을 택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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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행복.
저녁 별이 빛나는 도시 변두리, 불 켜진 지붕 밑 방에서 그는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며 살았다. 습습한 거리와 재래식 시장의 냄새와, 새벽 일에 지친 사람들의 때묻은 옷자락에 스치고 부대끼며, 그는 살았다. 자신의 세계를 그는 사랑하였다. 선술집의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 가득 찬 김치찌개 냄새 같은 것을, 여인숙 방이나 낡은 버스 터미널에 스민 바람 냄새 같은 것을 그는 사랑하였다. 김오르는 군밤 난로 곁에 쭈그리고 앉은 할머니의 찌든 얼굴 같은 것을 사랑하였다. 쓸쓸한 초겨울 거리에 흩날리는 바싹 마른 낙엽 같은 것을 사랑하였고, 하얀 눈의 역설적인 따스함을 사랑하였다. 그 차가운 따스함에 어린 가슴 아픈 추억처럼 겨울을 사랑하였고, 회색 도시의 무덤덤함을 사랑하였다. -그렇게 살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하지만 쓸쓸해 하고 슬퍼하고 아파하며 살았다. 작은 행복. 얼어붙은 잿빛 거리를 그는 촘촘히 걷는다. 매일매일 작업하고 시를 쓰며, 조그만 지붕 밑 방에서 다시 혼자가 되기 위해. 그의 방은 따스할 것이다. 전기난로 하나로 만족할 것이다. 창문을 열면 별이 보일 것이다. 펼쳐진 지붕들 아래로 불빛들이 보일 것이다. 그 안에는 사람들이,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는 위안받을 것이다. 마음 뿌듯하게 커피를 마시며 혼자가 아닌 듯 가슴 훈훈할 것이다. 조그만 턴테이블에 낡은 LP로 음악을 들으며, 그는 만족하여 다시 붓을 들 것이다. 작은 행복. 몇 권의 그가 사랑하는 책- 자주 읽어 겉표지가 닳은 그 책들을 쓰다듬으며, 심지어 마음 아플 때에도 따사로울 것이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그는 다시 그리고 쓸 것이다. 끝없이 그렇게 할 것이다. 그래서 힘겨운 그의 수레바퀴를 굴려 갈 것이다. 만족하고 감사하며 기꺼이 그 길을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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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적인 세계를 알고 있다. 그것은 내가 바라보고 내 속에서 어떤 이미지를 머금게 된 세계이다. 세상이란 곳은 감상적이리만큼 시적이었다. 안타깝고, 아름다우며, 시정에 흠뻑 젖어있는 세계였다. 늘 감탄하면서, 놀라고, 애증을 느끼면서, 그 세상을 바라보았다......
세계, 그리고 그 세계를 사는 사람들을.
나는 알고 있다. 이것만이, 오직 이것만이 나의 '무엇'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다. 나는 언제나 강박관념처럼 이 주제로 돌아올 것이다. 그건 내가 작업가가 된 근원적인 동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걸 구현해 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도 내 머릿속에 안타깝게 떠오르며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그것은 추상적인 음계라든가 뒤섞인 색채의 이미지가 아니다.
지울 수 없는 추억처럼 담담히 펼쳐진 채 흘러가는 이 세계, 한없는 시정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너무나 차갑고 잔인한 이 세계, 그리고 이 세계 안에 안겨 발버둥치며, 한때의 추억같은 일시적인 생에 잠깐 초대받은 인간의 무리.
그것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아니 그리든 쓰든, 어떻게든 만들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느끼는 바 대로, 왜냐면 어디에도 내가 느끼는 것과 같이 느끼게 하는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나 혼자 그것을 바라보고 느끼고, 그냥 내 삶과 함께 그것이 사라져 버린다 해도, 사실은 조금도 상관없는 일일 텐데, 나는 견딜 수 없었다. 토해내어 만져볼 수 있는 어떤 덩어리로 구현해 놓기 전에는, 언제나 이 초조와 안타까움에 쫓겨야 할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하듯이 혼자 간직하고 잊어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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