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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안미숙_게시판

운보--김기창

雲甫 金基昶 年譜(1914~
연보
1914(1세) 서울 종로구 운니동 18번지에서 태어나다.

1921(8세) 인사동에 있는 승동 보통학교에 입학. 오전에는 학교에서 신문학을 배우고 오후에는 서당에서 구학문을 배우게 되다. 학교 운동회날 장티부스에 걸려 어미니의 지극한 간호로 생명은 건질 수 있었으나 고열에 의한 청신경 마비로 모든 소리로부터 버림받은 후천성 귀머거리가 되다.

1925(12세) 승동 보통학교 1학년 복학. 선생님의 강의를 단 한마디도 들을 수 없어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공책에 낙서-사람, 새, 꽃, 나무, 산 등 생각나는대로 그림-를 하는 것을 안 어머니는 아들의 그림 소질을 인정하고 그림 공부에 남다른 열성을 보임.

1930(17세) 어머니는 친구의 소개로 이당 김은호 화백을 찾아가 아들을 화가로 키워줄 것을 당부한다.

1931(18세) 이당 김은호 화백에게 그림을 배운지 6개월 만에 선전 미술 전람회에 출품할 기회를 얻다. 출품을 계기로 어머니가 운포(雲圃)란 아호를 주다.

1932(19세) 제11회 선전에 입선. 이때부터 대가의 기질을 발휘하기 시작.

1935(22세) 충무로에 있는 일본인의 사진 재료상에서 흑백 사진에 채색한 사진화 개인전을 갖다.

1937(24세) 제 16회 선전에서 '古談'으로 특선. 할머니 주위에서 옛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의 모습을 담은 작품.

1939(26세) 제18회 선전에서 특선. 한복으로 정장한 여인이 박물관에서 관람하는 모습을 담은 작품. 이때 까지도 정적인 분위기의 작품들이었다.

1943(30세) 우향 박래현의 방문을 받다. 이날 이후 두사람은 자주 만나 미술에 대한 서로의 의견을 나누었다.

1945(32세) 8.15광복을 맞아 아호 운포(雲圃)에서 포자의 굴레같은 口를 벗겨 甫자로 시원스레 해방시킴. 이 시점부터 동양화가 전도양식에만 구애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1946(33세) 우향 박래현을 아내로 맞다.

1947(34세) '自由新聞'사의 문화부 기자로 취직. 민속 박물관에 미술 부장으로 취임하여 민속 공예품을 연구하면서 민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50(37세) 제4회 부부전 중에 6.25발발. 9.28수복시 많은 예술인들이 납북되었으나 귀먹은 덕분에 모면함.

1951(38세) 화필을 들고 작품에 열중하다가 잠시 조는 사이에 문득 고난의 예수를 현몽. 이것을 계시로 예수의 일대기가 동족상잔의 민족적인 비극과 퍽 유사함을 깨닫고 회화로 승화시키려 복음을 연구.

1952(39세) 운보에게 있어서 이 때가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밖으로는 나라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말려있고 안으로는 예술 완성의 갈등과 실험의 단계였다. 전통 동양화의 탈피만이 보다 차원 높은 예술의 길로 갈 수 있다는 생각에서 동양화의 사실적 평면 구성에서 입체적 구성을 시도함으로써 입체파의 선구가 되다. 구멍가게, 노점상 시리즈 제작 시작.

1954(41세) 홍익대학교 미술학과 전임 강사로 취임하여 후진을 양성하다.

1955(42세) 자유분방하고 대담하게 대작 '군마도'를 제작하는 한편 우리의 전승 예술인 가면극을 작품화한 '탈춤'시리즈를 제작 발표. '탈춤'시리즈에서 사실보다는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부여한 굵은 선을 보이면서 그것이 바로 '문자도'라는 완전 추상의 세계로 넘어가게 된다.

1956(43세) 국전 초대작가가 되다.

1957(44세) 한국화의 정립과 발전을 위해 '白陽會'를 창립.

1959(46세) 대작 군작(郡雀)을 제작. 1,000여 마리의 참새떼가 양편에서 날아와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을 통해 인간의 극렬한 생존 경쟁을 묘출해 냈다. 그것은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 민족의 비극을 형상화 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크게는 인류 전쟁의 척도이다.

1962(49세) 수도 여자 사범대학 미술 교육과 회화과장으로 취임.

1963(50세) 12회 부부전을 계기로 완전 추상 계열의 작품으로 선보임.

1965(52세) 본격 추상 작품(태고의 이미지)시리즈와 청자의 이미지 시리즈를 통하여 동양화의 새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

1967(54세) 거의 수묵과 다름없는 검은 먹물만으로 전지에 학, 쌍학, 투계, 부엉이 등 네작품을 제작. 골법으로 처리된 작품은 활달하고 더할 수 없는 붓의 극치를 보여준다.

1968(55세) 우향은 뉴욕에서 유학하기로 결심하고 운보는 뉴욕에 머물면서 새 작품에 열중. 이때 제작된 작품이 '태양을 먹은 새', '나비의 꿈', '석양의 군마도' 등으로 적색과 황색이 채색의 주조를 이루어 매우 현대적이면서 다이나믹하여 주목을 끌다. 특히 '태양을 먹은 새'는 이때 제작된 다른 작품 어느 것보다 뛰어난 작품이다.

1970(57세) 그동안 시도했던 청록산수를 공식적으로 출품 선보이다.

1974(61세)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의 영정과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 조헌의 영정을 제작. 국가 표준 영정으로 저정받다. 국립 현대미술관 봉안.

1976(63세) 우향 박래현 타계. 오랫동안 가슴 속에서 응어리져 풀리지 않았던 민화에 대한 형상이 급속히 풀리며 바보산수 제작에 열정을 다하다.

1977(64세) 문화의 달에 수여되는 정부의 은관 문화훈장을 받다. 이미 타계한 우향을 기리고 또 평생의 소원이던 사설 미술관인 '운향 미술관'을 성북동 자택에 건립하다.

1978(65세) 성화집 '예수의 생애' 발간기념 특별전시회로 '운보 김기창 성화전'(경미화랑)개최. 51년부터 착수 제작한 예수의 전생애 전시.
'동양화 구주 순회 작품전의 귀국전'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하다. 이 전시에 관해 한국인보인 '유럽순회전통회화 귀국전(8.6일자)'이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이 순회전은 한국의 전통회화가 일본이나 중국회화와 확연히 구분되며 고유하고 독창적인 성격을 지녔음을 유럽인에게 알림으로써 종래의 오해를 푸는데 기여했다"고 보도 하였다.
우향을 추모하기 위해 '우향 유작전'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하다.
우향 유작전과 함께 대형화집 '우향 박래현'과 우향의 화문집 '사라의 빛 메아리'(경미간행1978) 및 운보의 산문집 '침묵과 함께 예술과 함께'(경미간행)도 출간되다.
바보산수 풍의 '달밤', 청록산수 풍의 '산', '백운도', '청산도Ⅲ' 제작하다.

1979(66세) 오랫동안 도시와 현대화에 시달려온 운보는 이제 동양사상의 근본인 자연과 벗하고 싶고 또 사람과 떨어져서 여생을 오직 작품 제작에만 열중하기 위하여 미술관을 겸한 화실을 청주에 건립하고자 착공하다.

1981(68세) 국민훈장 모란장서훈, 예술원 정회원 위촉, 세계 30개국 스케치 여행(중앙일보 이규일기자동행).

1982(69세) 농아 복지회관을 용산구 서계동에 개관 제27회 예술원상 미술부문수상, 중앙예술문화상 수상(중앙일보) 화도 50년 회고전.

1983(70세) 세계화필기행 화문집 발간.

1988(75세) 점과 선을 주제로한 심상 시리즈를 제작하기 시작. 예술원 정회원 위촉.

1989(76세) 예술원 정회원이 되다. 봉걸레에 먹을 묻혀 작업하는 등 점과 선을 주제로 심상시리즈 제작.

1990(77세) 한국일보 주최, 롯데 백화점 후원의 '백두산 가는 길' 행사 초대.

1991(78세) '운보 김기창 황금 백자전'을 롯데 미술관에서 개최.

1993(80세) 예술의 전당 미술관에서 팔순 기념 대 회고전을 가짐. 운보의 1930~40년 대의 작품 32점이 북한의 조선 미술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음을 확인.

1995(82세) 롯데화랑 부산점 개관기념 초대전. 오픈 당일 작품 실연을 보임으로써 작품에 대한 열정이 여전함을 과시.

1997(84세) 롯데화랑에서 '운보 김기창 예술 60년-미공개 작품전'이라는 제목으로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작품전 개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