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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아트/철학

고호 일대기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1890)

반 고흐는 1853년 3월30일 네델란드 북 브라반트의 그루트 준데르트마을에서 검소한 목사 테오도르의 6남매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소년시절부터 고독을 좋아했고 한가지 일에 열중하는 성격이었다.
반 고흐의 어머니는 처녀시절 수채화를 잘 그렸으며 반 고흐의 외사촌인 안톤 모브는 헤이그파의 우두머리였다.

16살때 백부 센트의 주선으로 헤이그의 구필 화상의 점원이 되었으며 4년동안 런던지점과 파리지점에서 근무하면서 복제미술품등을 판매했다.

런던에서 고흐는 첫 사랑에 빠진다. 하숙집 주인의 딸인 우슐라에게 사랑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슐라는 약혼한 몸이었다. 그럼에도 집념이 강한 고흐는 우슐라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않았다.
결국 백부는 힘을 써서 그를 파리로 전근시키도록 했다.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생활하게된 고흐는 몽마르트르 언덕에 거주했다.
그러나 화상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1881년까지 거의 6년동안 신비주의에 탐닉한다.
그런 가운데 고흐는 루브르 박물관 뤽상부르공원 을 자주 찾았고 하이네 키츠 위고 롱펠로우 등의 문학작품에도 탐닉했다.

예술작품 거래는 도둑질...화랑서 쫓겨나

그는 화상일을 하면서도 "예술작품의 거래는 일종의 조직적인 도둑질"이라고 극언할 정도였다. 결국 주인에게 밉보인 고흐는 1876년에 해고당하고 만다.
화랑에서 일하면서, 평생토록 그의 후원자가 될 동생 테오는 형 고흐에게 화가의 길을 걷도록 권유했지만 어떤 종류의 죄의식이 그것을 가로 막았다.

고흐는 대신 런던근교의 기숙학교의 어학교사로.
도흐르레흐트의 서점의 점원으로 취직했지만 모두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런던에서 우슐라가 결혼한 것을 알았다.
실연으로 희망이 사라지자 고흐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목사가 되고 싶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러나 목사가 되려면 25세가 되어야했다.

고호는 1878년 8월에 벨기에의 수도 브뤽셀에서 목사공부를 시작한다.
단기목사양성과정을 수료한뒤 자원하여 그는 남부 벨기에의 탄광지대인 보리나즈로 갔다.
여기서 그는 부목사가 되어 열렬한 신앙심을 가지고 모든 것을 희생하여 궁핍한 사람들을 돌보면서 전도에 몰두했다.
그는 댄스홀에서 강론을 하는등 너무나 전위적인 사목방법을 듣고 놀란 고흐의 아버지는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찾아왔지만 소용없었다.

고흐는 탄광에서 파업이 일어나자 모금운동을 전개하는 등 광부와 다름없는 행동을 하여 사목직을 박탈당했다.
그에게 남은 것은 회한뿐이었다.
그는 그림을 시작했다.

고흐는 동생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그림을 다시 시작하고 보니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 반 고흐는 처음에는 종교를 통해 민중에게 봉사하려 하고,나중에는 예술을 통해 민중에게 봉사하는 길을 찾는 것이다.

1880년10월 반 고흐는 보리나즈를 완전히 떠났다. 그는 도보로 브뤽셀에 갔다.
그해 겨울 내내 그는 그림을 팔아서 빵을 벌기위해 브뤽셀거리를 헤매야했다.

그림의 스승으로 렘브란트 골라

그는 헤이그등지에서 그림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나 또다시 불행한 사랑에 빠진다.고흐는 과부이자 네살박이 애엄마인 사촌 키 보스를 연모하게 된 것이다.
결국 그는 부도덕한 인간으로 낙인찍혔다.

1881년12월 헤이그로 간 고호에게 모브가 아틀리에를 빌려주면서 그림의 기초를 가르쳤다.
테오는 재정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오랜 방황 끝에 고호는 창작의 자유, 그것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고흐가 모브에게서 배울 것은 없었다.
석고상을 복사하는 대신에 반 고흐는 주제에 의한 그림그리기를 선호했다.
고흐는 렘브란트의 그림에 열광하여 그림의 스승으로 렘브란트를 골랐으며 모브를 배척했다.

1882년 1월 고흐는 또 하나의 여인을 만난다.
병든 임신 창녀인 시엥을 만나 아이들까지 돌보아준다.
고흐는 시엥이 사회의 희생물이라고 측은히 여기면서 시엥을 돌본다.그러나 사내아이를 낳은 시엥은 거리의 여자로 다시 나섰다.
고흐는 테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테오는 그를 시엥에게서 떼어냈다.

고호는 1883년 9월부터 12월까지 3개월을 드랑트에서 보낸다.
그곳은 황량하고 낙후된 곳으로 사람들은 돼지나 까마귀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미칠듯한 우울'이라고 묘사했다.
화상과의 문제로 미국으로 가고싶어 한 고흐는 테오에게 동양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또 테오에게 화가의 길을 권하기도 했다.

동양으로 가고싶어한 고흐

그러나 너무나 먼 지방에서 고독감에 사로잡혀 있던 고흐는 아버지의 새 교구인 뉘넨으로 갔다.
고흐는 여기서 1885년 11월까지 이태를 머무르게 된다. 그는 두칸짜리 방을 빌려 주로 농부와 직조공 광부들을 그렸다. 그런데 또다른 비극이 싹텄다.
40이 가까운 이웃여인 마고 베제만이 고흐에게 반한 것이다. 그들은 결혼을 약속했지만 베제만 가문에서 반대했다.
그러자 베제만은 독약을 마셔버렸다.
고흐는 그녀의 가족들에게 사라지겠다고 약속할수 밖에 없게된다. 1885년 3월26일 아버지가 숨졌다.
그는 유산을 받지 않았다.
그 겨울 내내 그는 그림을 그려 그의 초기의 걸작인 '감자를 먹는 사람들(Les Mangeurs de pommes de terre)'을 완성한다.

고흐의 초기의 그림들은 언제나 노동자 농민등 하층민의 그림으로, 색조는 렘브란트나 밀레를 따라 지극히 어두었다.
그의 주변의 생활과 풍경의 반영이었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결코 귀족이나 귀부인들이 아니다.
농부 광부 직조공 우체부등 하나같이 가난하고 소외된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간군상들로서 반 고호 자신이 애정있 게 보아온 존재들이었다.
따라서 반 고흐는 그들이 생활에 사용하는 도구들을 상세하게 화폭에 담았다.

그는 늘 빈곤과 병고에 시달렸다.
그가 화상의 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동생 테오를 찾아 파리에 온것은 1886년3월이었다.
그전에도 그랬지만 고흐가 죽기까지 생활비는 동생이 대어야 했다.

인상파 화가 접하면서 밝은 화풍으로

파리에서 고흐는 코르몽의 화숙에서 베르나르와 로트렉을 알게됐고 또 인상파의 밝은 그림과 일본의 우끼요에를 접함으로써 그때까지의 렘브란트나 밀레의 어두운 화풍을 접고 밝은 그림들을 그리게 되었다.

그후부터 고흐는 정열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는 파리에 짜증을 느꼈으며 일본으로 가고 싶었다.
화가인 투루즈 드 로트렉 역시 반 고흐에게 남프랑스로 갈것을 권했다.
그러나 재정형편상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일본의 풍광을 닮은 남불 프로방스로 가게된다.
그는 1888년2월 아를르로 이주했다. 그뒤 2년간 고흐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자신의 예술을 불꽃처럼 불태운다.
그러나 곤궁한 생활은 여전했다.
나흘동안 아무것도 못먹고 커피만 23잔을 마신 적도 있다.

신들린듯 그리며 불꽃처럼 生을 태워

그는 남프랑스에서 이글거리는 밝은 태양, 빛나는 별, 삼나무 숲, 카페, 강과 다리등 맑고 밝은 풍광에 사로잡혀 건강도 돌보지않은채 오로지 그림만을 그렸다.
또 고갱과 베르나르에게 그곳으로 올것을 간곡히 청했다.

그의 청을 받아들인 고갱은 1888년 10월 23일 아침 기차편으로 아를르에 도착하여 두 화가의 공동생활이 시작됐다.
그러나 양인은 성격차이가 심해 공동생활이 순조롭지 못했다.그해 12월 고흐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켰다.
그는 고갱과 다툰 끝에 면도날로 자신의 귀를 잘라 버렸다.
그후 고흐는 발작과 입원의 생활을 계속했다.
발작이 없는 동안에는 불꽃처럼 그림을 그려댔다.

'셍레미 정신병원의 복도(Le Couloir de l'asile de Saint-Remy)'는 당시의 걸작이다.

권총자살 성당위 공동묘지에 묻히다

정신병에 지친 그는 동생의 권유로 파리에 돌아온데 이어 예술가들과 교분이 두터웠던 파리 근교 오베르 쉬르 와즈의 정신신경과 의사 가셰에게 찾아간다.
90년 5월이었다. 그는 오베르에서도 많은 풍경화와 인물화를 그렸다.
<의사 가셰>나 그의 딸인 <마르그리트 가셰>는 이 때의 걸작이다.
때로는 건강도 회복되어 발작의 불안에서 벗어나는듯 했으나 7월부터 다시 쇠약해져서 그달 27일 권총자살을 기도해 3일뒤인 7월30일에 죽었다.
그리곤 오베르 쉬즈 성당위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의 유작은 매우 많다. 지금은 온세상이 그의 작품을 찬양한다.
1987년11월12일 Les Iris(붓꽃)은 소더비 예술품 경매에서 3억2천만프랑(약 768억원)에 팔려 세계 에서 가장 비싼 그림값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생전의 그는 그림의 진가를 인정받지못해 그의 동생이 안타까워했다.

1903년의 유작전에서 사람들은 그에게 주목했다.
그는 짧은 생애에서 875점의 회화와 1,100점의 데셍을 그렸다.
특히 남불의 시대에서만 보면 아를르의 시절에 회화 185점 데셍 125점을 그렸으며 셍레미시절에는 150점의 회화 140점의 데셍을 그렸다.
저명한 작품은 40점가까운 자화상 이외에 <아를르의 도개교>, <해바라기> <아를르의 침실> <별이 빛나는 밤> <밤의 카페> <삼나무와 별이있는 길>등이 특히 유명하다.

회화를 소장국가별로 보면 네델란드364점, 미국 190점, 스위스 80점, 프랑스 45점, 영국 35점, 독일 25점, 러시아 10점, 암스테르담의 반 고호 미술관 205점, 오텔로의 크롤러 뮐러 미술관 95점등이다.

참고 사이트 http://www.vangogh.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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