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부모
테오도루스 반 고흐(1822년생)는 안나 카르벤투스(1819년생)와 결혼했다. 테오도루스 반 고흐는 '잘 생긴 남자'로 통했으며, 온화한 성격을 가진 평범한 목사였다. 서적 판매상의 딸이었던 안나 카르벤투스는 친절하고 존경받는 여자였다. 그러나 그녀는 장남 고흐의 까다로운 성격을 이해하지 못했다. 부모에게서 인정받기를 무척이나 갈구했던 고흐는 자신들의 계급과 시대에 충실한 이 전형적인 부모에게 골치거리였다.
고흐의 형제와 누이들
고흐의 여동생 안나는 고흐보다 두 살 아래였다. 고흐는 안나와 영국에서 같이 일할 때 처음에는 사이좋게 지냈다. 안나보다 두 살 아래가 테오였고 다시 두살 아래가 엘리자베스였다. 테오는 고흐의 일생동안 친구이자 동반자였으며, 고흐의 정신적, 물질적 지주가 되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고흐와 그리 가깝지 않았지만 1910년 고흐에 대한 회상록을 썼다. 빌헬미엔은 고흐보다 아홉 살이나 아래였지만 고흐의 파리 시절에 서신을 주고 받았다. 열세 살 밑 동생인 막내 코르넬리우스는 1900년 고흐처럼 자살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그리고...
테오의 아내인 요 봉거 반 고흐는 고흐 이야기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주인공이다. 그녀는 한번도 고흐를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형제의 비극적인 죽음 후에도 제 몫을 다했다. 그녀는 고흐가 쓴 수백 통의 편지를 옮겨 적고 편집한 후 고흐의 위대함이 인정받을 때를 기다려 그것을 출판했다.
빈센트의 친척
고흐의 삼촌들
빈센트에게는 5명의 삼촌이 있었다. 빈센트 반 고흐 (센트), 헨드리크 반 고흐, 하임 반 고흐, 코르넬리우스 반 고흐, 요한네스 반 고흐. 그 중, 앞의 네 사람은 화상이었으며, 이는 초기에 고흐가 화랑의 점원이 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요한네스는 해군 장교였다.
고흐의 외사촌, 케 보스
케 보스는 고흐의 이모인 빌헬미나와 스트리커 목사 사이의 딸로, 고흐보다 두살이 많았다. 그녀는, 고흐가 절망적인 사랑 고백을 거절했으며(미망인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이로 인해 고흐는 비참함에 빠진다.
안톤 모브
1881년 후반 고흐는 헤이그로 이주해 헤이그 유파의 주요 화가이자 외사촌인 안톤 모브에게 그림의 기초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고흐의 성격과 창녀와 사는 고흐의 모습을 보고 고흐와의 관계가 멀어졌다.
테오도로스---안나
ㅣ
빈센트 안나 테오 엘리자베스 빌헤미엔 코르넬리우스
고흐의 이웃들
다음에 나오는 사람들은 고흐의 일생에 있어,
고흐와 절친했거나 고흐의 인생에 긍정적, 부정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외제니 로이어
헤이그에서 지내던 고흐는 20세에 런던으로 갔다. 그는 그 곳에서 하숙집 여주인의 딸 외제니 로이어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약혼을 한 상태였다. 사랑을 고백할 때까지 그 사실을 몰랐던 고흐는 좌절한 채 곧바로 런던을 떠나버렸다. 그러나 그녀의 약혼을 알고 나서도 그녀에게 파혼을 종요하면서 한동안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는 최근의 견해도 있다. 이 이야기는 고흐의 인생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지만,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슬레이터 존스 목사
구필 화랑에서 해고된 후, 영국에 돌아가 교사 생활을 할 때, 빈센트에게 도움을 주었다. 토머스 슬레이드 존스 목사는 보수를 전혀 받지 않고 교직 생활을 하던 고흐에게 1년에 15파운드와 함께 숙소를 제공했다. 목사는 고흐의 신교도적 열정을 알아채고 그를 격려해주었다. 슬레이드 존스와 그의 부인 안나는 고흐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브뤼셀의 목사들
고흐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전도사 양성 학교를 다녔다. 그 이후, 전도사는되지 못했지만, '가난한 자들, 굶주린 자들에게 성경말씀을 들려주기 위해' 보리나주로 떠나게 되는데, 피터센 목사와 데 용 목사의 도움을 받았다.
크리스틴
고흐가 헤이그에 있을 때, 매춘을 하며 살아가던 클라지나 마리아 후르닉(시엔이라는 별명을 지녔으며, 고흐는 크리스틴이라 불렀다)이라는 시골 여자와 함께 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아버지와 연락이 단절되었으며, 그의 외사촌 안톤 모브와도 관계가 끊어졌다.
마르고트
고흐가 누에넨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 때, 그녀는 이웃에 살고 있었다. 고흐의 일생에 있어 고흐를 사랑하려 했던 유일한 여자이며, 둘은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그녀 집안의 반대에 부딪치고, 그녀가 자살하려는 소동이 있은 후, 고흐는 앙트워프로 떠나게 된다. 참고로 그녀의 나이는 고흐보다 10살이 많았다.
파리 시절의 화가들
고흐가 테오와 함께 파리에 살고 있을 때, 테오의 주선으로 당시의 많은 인상파 화가들, 새로운 조류를 형성하려는 화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모네, 시슬리, 파사로, 드가, 쇠라, 고갱, 베르나르 등.
이 중 고갱은 나중에 아를에서 함께 살기도 했으며, 베르나르는 고흐가 자살하기까지 절친하게 지낸 친구 중 한 사람이 되었다.
탕기 영감
탕기 영감은 미술 재료상이었으며, 재료값으로 화가의 그림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고흐도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탕기 영감도 고흐를 적극 후원했다.
조셉 룰랭
아를에서 보낼 때, 친하게 지내던 우체부였다. 비단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 등 가족 전체와 친하게 지냈다. 고흐는 룰랭을 "착하고 현명하고 감정이 풍부하고 믿을 만한 친구"라고 말했다.
지누 부인
고흐의 작품 '밤의 카페'의 배경이 된 카페의 여주인이다.
레 박사
펠릭스 레 박사는 아를 병원의 자상한 인턴이었다. 고흐는 죽기 3주 전쯤 그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페이롱 박사
생레미 병원에 있을 때, 고흐를 돌보던 의사이다.
알베르 오리에르
고흐가 죽던 해, 파리의 평론가 알베르 오리에르는 지나칠 정도로 고흐에 대한 찬양이 담긴 글을 게재하였다. 이것은 고흐가 생전에 받은 유일한 평이다.
가셰 박사
가셰 박사 부부는 세잔, 피사로 등 여러 화가와 친분이 있었다. 그들은 오베르에 살았으며 고흐의 마지막 몇 달 동안, 그의 비극적인 죽음을 막을 수 없었지만, 그를 많이 후원해주었다
테오도루스 반 고흐(1822년생)는 안나 카르벤투스(1819년생)와 결혼했다. 테오도루스 반 고흐는 '잘 생긴 남자'로 통했으며, 온화한 성격을 가진 평범한 목사였다. 서적 판매상의 딸이었던 안나 카르벤투스는 친절하고 존경받는 여자였다. 그러나 그녀는 장남 고흐의 까다로운 성격을 이해하지 못했다. 부모에게서 인정받기를 무척이나 갈구했던 고흐는 자신들의 계급과 시대에 충실한 이 전형적인 부모에게 골치거리였다.
고흐의 형제와 누이들
고흐의 여동생 안나는 고흐보다 두 살 아래였다. 고흐는 안나와 영국에서 같이 일할 때 처음에는 사이좋게 지냈다. 안나보다 두 살 아래가 테오였고 다시 두살 아래가 엘리자베스였다. 테오는 고흐의 일생동안 친구이자 동반자였으며, 고흐의 정신적, 물질적 지주가 되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고흐와 그리 가깝지 않았지만 1910년 고흐에 대한 회상록을 썼다. 빌헬미엔은 고흐보다 아홉 살이나 아래였지만 고흐의 파리 시절에 서신을 주고 받았다. 열세 살 밑 동생인 막내 코르넬리우스는 1900년 고흐처럼 자살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그리고...
테오의 아내인 요 봉거 반 고흐는 고흐 이야기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주인공이다. 그녀는 한번도 고흐를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형제의 비극적인 죽음 후에도 제 몫을 다했다. 그녀는 고흐가 쓴 수백 통의 편지를 옮겨 적고 편집한 후 고흐의 위대함이 인정받을 때를 기다려 그것을 출판했다.
빈센트의 친척
고흐의 삼촌들
빈센트에게는 5명의 삼촌이 있었다. 빈센트 반 고흐 (센트), 헨드리크 반 고흐, 하임 반 고흐, 코르넬리우스 반 고흐, 요한네스 반 고흐. 그 중, 앞의 네 사람은 화상이었으며, 이는 초기에 고흐가 화랑의 점원이 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요한네스는 해군 장교였다.
고흐의 외사촌, 케 보스
케 보스는 고흐의 이모인 빌헬미나와 스트리커 목사 사이의 딸로, 고흐보다 두살이 많았다. 그녀는, 고흐가 절망적인 사랑 고백을 거절했으며(미망인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이로 인해 고흐는 비참함에 빠진다.
안톤 모브
1881년 후반 고흐는 헤이그로 이주해 헤이그 유파의 주요 화가이자 외사촌인 안톤 모브에게 그림의 기초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고흐의 성격과 창녀와 사는 고흐의 모습을 보고 고흐와의 관계가 멀어졌다.
테오도로스---안나
ㅣ
빈센트 안나 테오 엘리자베스 빌헤미엔 코르넬리우스
고흐의 이웃들
다음에 나오는 사람들은 고흐의 일생에 있어,
고흐와 절친했거나 고흐의 인생에 긍정적, 부정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외제니 로이어
헤이그에서 지내던 고흐는 20세에 런던으로 갔다. 그는 그 곳에서 하숙집 여주인의 딸 외제니 로이어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약혼을 한 상태였다. 사랑을 고백할 때까지 그 사실을 몰랐던 고흐는 좌절한 채 곧바로 런던을 떠나버렸다. 그러나 그녀의 약혼을 알고 나서도 그녀에게 파혼을 종요하면서 한동안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는 최근의 견해도 있다. 이 이야기는 고흐의 인생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지만,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슬레이터 존스 목사
구필 화랑에서 해고된 후, 영국에 돌아가 교사 생활을 할 때, 빈센트에게 도움을 주었다. 토머스 슬레이드 존스 목사는 보수를 전혀 받지 않고 교직 생활을 하던 고흐에게 1년에 15파운드와 함께 숙소를 제공했다. 목사는 고흐의 신교도적 열정을 알아채고 그를 격려해주었다. 슬레이드 존스와 그의 부인 안나는 고흐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브뤼셀의 목사들
고흐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전도사 양성 학교를 다녔다. 그 이후, 전도사는되지 못했지만, '가난한 자들, 굶주린 자들에게 성경말씀을 들려주기 위해' 보리나주로 떠나게 되는데, 피터센 목사와 데 용 목사의 도움을 받았다.
크리스틴
고흐가 헤이그에 있을 때, 매춘을 하며 살아가던 클라지나 마리아 후르닉(시엔이라는 별명을 지녔으며, 고흐는 크리스틴이라 불렀다)이라는 시골 여자와 함께 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아버지와 연락이 단절되었으며, 그의 외사촌 안톤 모브와도 관계가 끊어졌다.
마르고트
고흐가 누에넨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 때, 그녀는 이웃에 살고 있었다. 고흐의 일생에 있어 고흐를 사랑하려 했던 유일한 여자이며, 둘은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그녀 집안의 반대에 부딪치고, 그녀가 자살하려는 소동이 있은 후, 고흐는 앙트워프로 떠나게 된다. 참고로 그녀의 나이는 고흐보다 10살이 많았다.
파리 시절의 화가들
고흐가 테오와 함께 파리에 살고 있을 때, 테오의 주선으로 당시의 많은 인상파 화가들, 새로운 조류를 형성하려는 화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모네, 시슬리, 파사로, 드가, 쇠라, 고갱, 베르나르 등.
이 중 고갱은 나중에 아를에서 함께 살기도 했으며, 베르나르는 고흐가 자살하기까지 절친하게 지낸 친구 중 한 사람이 되었다.
탕기 영감
탕기 영감은 미술 재료상이었으며, 재료값으로 화가의 그림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고흐도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탕기 영감도 고흐를 적극 후원했다.
조셉 룰랭
아를에서 보낼 때, 친하게 지내던 우체부였다. 비단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 등 가족 전체와 친하게 지냈다. 고흐는 룰랭을 "착하고 현명하고 감정이 풍부하고 믿을 만한 친구"라고 말했다.
지누 부인
고흐의 작품 '밤의 카페'의 배경이 된 카페의 여주인이다.
레 박사
펠릭스 레 박사는 아를 병원의 자상한 인턴이었다. 고흐는 죽기 3주 전쯤 그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페이롱 박사
생레미 병원에 있을 때, 고흐를 돌보던 의사이다.
알베르 오리에르
고흐가 죽던 해, 파리의 평론가 알베르 오리에르는 지나칠 정도로 고흐에 대한 찬양이 담긴 글을 게재하였다. 이것은 고흐가 생전에 받은 유일한 평이다.
가셰 박사
가셰 박사 부부는 세잔, 피사로 등 여러 화가와 친분이 있었다. 그들은 오베르에 살았으며 고흐의 마지막 몇 달 동안, 그의 비극적인 죽음을 막을 수 없었지만, 그를 많이 후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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