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7원칙 ①실험정신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을 시험하려는 열의와 고집, 실수에서 배우려는 의지
지금까지 당신이 만난 가장 훌륭한 선생님을 생각해보자.
어떤 점이 훌륭한 선생님을 만드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학생이 스스로 배우도록 도와주는 능력일 것이다. 훌륭한 선생님들은 경험 이야말로 지혜의 원천임을 너무나 잘 안다. 그리고 실험 정신의 원 칙이야말로 자신의 경험을 가장 잘 이용하는 열쇠이다.
레오나르도는 화가이자 조각가인 거장 안드레아 델 베로기오의 스튜디오에서의 경험을 잘 이용했다. 다 빈치의 전기 작가인 서지 브램리는 베로키오를 '일인 미술 대학'으로 일걷는다. 베로키오의 스튜디오에서 도제로 일하던 젊은 레오나르도가 받은 훈련은 이론보다 경험이었다. 그는 캔버스와 물감을 준비하는 법을 배웠으며 원근법을 처음으로 배웠다. 조각과 청동 주물 작업, 금세 공 기술의 비법을 전수받았으며 직접 관찰을 통해서 식물의 구조와 동물과 인체의 해부학을 연구하도록 격려받았다. 이로써 레오나르 도는 실용적인 태도를 가지고 성장할수 있었다.
레오나르도의 실용적인 태도와 날카로운 지성 호기심, 독립 정 신은 그로 하여금 당시의 이론과 도그마에 많은 부분 회의를 품게 했다. 예를 들면 지질학을 연구하던 중 그는 롬바르디의 산 정상에 서 화석과 조개 껍데기를 발견했다. 〈코텍스 레스터〉에서 그는 이런 것들이 산 위에 있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홍수 때문이라는 당시의 보편적인 견해에 단호하게 도전했다.
레오나르도는 이론에 근거하지 않고 논리적인 사고와 실생활의 경험에 근거해서 자기 주장을 폈다. 인습적인 지혜의 기반인 가설들 에 대해 논쟁을 벌이면서 그는 마침내 ‘이성을 가진 두뇌 속데 그 런 견해는 도저히 자리잡을 수 없다.’ 라는 결론을 냈다. 지질학을 연구하면서 레오나르도는 롬바르디의 언덕을 걷다가화석을 발견하 게 됐다.
또 해부학을 연구할 때 3O구 이상의 인체와 수없이 많은동물을 절개했다. 화석을 연구했을 때처럼 그의 해부학 연구도 당시의 권 위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제시한 증거가, 경험하지 않고 그저 판단에 의해 내린 존경받는 권위자들의 이론에 반대된다고 하여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 을 것이다. 그들은 내 연구가 단순하고 명료한 경험에 의한 것이란 점은 고려하지 않는다.’
레오나르도는 평생 동안 자신을 ‘글줄을 믿지 않는 사람’ 이자 경험의 사도’라고 칭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보기에 경험에 서 탄생하지 않은 과학은 쓸모 없고 실수투성이이다. 경험이야말로 모든 확신의 어머니이다. 창의성이나 수단 목적이 있는 직접 경험 은 다섯 군데 감각 기관중 한군데를 지나갔다.’ 레오나르도는 창의적이고 독립적인 사고 방식의 옹호자였다. 그 는 “다른 사람의 방식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 왜냐 하면 남의 방식 을 모방한 사람은 자연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라 불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라고말했다. 그는 또 “자연이 형성하는 것의 풍요로움을 염두에 둘 때 자연에 곧바로 다가가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했다. 이렇듯 모방을 거부하고 권위에 도전하고 스스로 생각하려는 레오 나르도의 의지는 나이에 상관없이 어느 때나 확연했다. 그리고 윌리 엄 맨체스터도 강조했듯 레오나르도가 ‘모든 지식은 이미 밝혀졌 다.’라고 생각했던 시대에 살았다는 점을 염두한다면 그가 그런 태 도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 정말 놀라울 뿐이다.
또 레오나르도는 위선적이지 않은 사상가였으며 미신을 믿지 않 는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연금술과 천문학에 관심을 갖는 것을 경험과 창의력의 적으로 보았다. 그리고 '천문학자들이 모두 제거 될 날'을고대했다. 학자와 학문의 전통을 비판적으로 봤던 그였지만, 소중한 면까지 다 버리지는 않았다. 예를들면 그는 1494년 마혼두 살의 나이에 고 전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라틴어를 독학했다. 그리고 자 신의 서가에 성경 이솝 우화 디오게네스(BC412?~BC323 옛 그리스 철학자), 오비디우스(BC43~AD17? 로마의 시인), 단테, 페트라르카 (14세기 이탈리아의 시인)의 작품을 비롯해서 농업과 해부학, 수학, 의학 전쟁에 관한 책들을소장했다고 한다.
다 빈치 학자인 에드워드 맥커디 교수는 ‘그는 관심 있는 주제에 관해 구할 수 있는 모든 고전을 구하고 중세의 문헌을 공부하는 습 관이 있었다.’ 라고 강조한다.
레오나르도는 브라만테, 마기아벨리, 루카 파치올리, 마르칸토니 오 델라 테레를 포함해 위대한 지성들과 교제했다. 그는 타인의 저 서를 대리 경험’으로 보았고 비판적으로 꼼꼼히 연구하고, 결국 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실험해 봐야한다고 믿었다.
레오나르도는 선입견과 책에 나오는 편견’ 이 과학적인 의문을 던지는 데 얼마나 제한을 가하는지 알았다. 그리고 경험에서 배우는 것은 곧 실수에서 배우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경험에는 실수 가 없다. 다만 경험에서 비롯되지 않은 결과를 짐작하는 것이 실수 일 뿐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시대를 망라해서 가장 뛰어난 천재로 인식되고 있는 다 빈치 역시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가장 눈에 띄는 실수로는 〈안기아 리의 전투〉와 〈최후의 만찬〉에서 물감올 붙이는 실험이 실패로 돌아간 일, 피렌체 여태후의 후원을 받아 실험한 아르노 강물을 돌리 려던 시도, 땅에서 이륙하지 못했던 비행 기구 실험을 꼽을수 있다. 특히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주방을 자동화하려는 계획은 엄청난 실패로 끝나버렸다. 레오나르도는 대규모 연회의 수석 주방장을 맡 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2백 명이 넘는 손님에게 각 코스마다 조각품 같은 요리를 대접하려는 어마어마한 계획을 세웠다.
접시는 축소 미술품으로 디자인되었다. 레오나르도는 보다 강력 한 새 스토브와 접시를 운반하는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을 설치했으 며, 화재에 대비해서 대형 스프링클러 시스템을 설치하기도 했다. 한데 연회가 열리던 날, 모든 게 엉망이 되어 버렸다. 주방에서 일하 는 하인들은 레오나르도의 요구대로 음식을 섬세하게 자르지 못했 다. 그래서 그는 백 명 이상의 미술가 친구들을 불러서 도움을 청하 게 되었다. 그러자 주방은 북새통을 이루었고 컨베이어 시스템은 작 동이 되지 않은데다 결국 화재까지 일어났다. 스프링클러의 작통이 너무 잘된 나머지 음식은 물에 휩쓸려버렸고, 주방 안에 물난리가 나버렸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실수와 사고, 실패, 좌절감에도 아 랑곳하지 않고 배우고 탐구하고 실험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지식을 추구하는 데 있어 초인적인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 는 노트에 쟁기를 그리고 옆에 '내 밭에서 떠나지 않겠다.' 라고 썼 다. 또 다른 곳에는 장애물이 나를 꺽지 못한다.’ ‘어떤 장애든 고 된 노력으로 극복된다.’ 라고 써 놓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자연과 인간에 대한 놀라운 작품들〉의 집 필자 마틴 캠프는 이렇게 말한다. ‘레오나르도가 어떤 원칙을 경작 하고 싶은 밭으로 보았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그 원칙 은 그가 ‘경험’ 이라고 이름붙인 것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7원칙 ①실험정신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을 시험하려는 열의와 고집, 실수에서 배우려는 의지
지금까지 당신이 만난 가장 훌륭한 선생님을 생각해보자.
어떤 점이 훌륭한 선생님을 만드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학생이 스스로 배우도록 도와주는 능력일 것이다. 훌륭한 선생님들은 경험 이야말로 지혜의 원천임을 너무나 잘 안다. 그리고 실험 정신의 원 칙이야말로 자신의 경험을 가장 잘 이용하는 열쇠이다.
레오나르도는 화가이자 조각가인 거장 안드레아 델 베로기오의 스튜디오에서의 경험을 잘 이용했다. 다 빈치의 전기 작가인 서지 브램리는 베로키오를 '일인 미술 대학'으로 일걷는다. 베로키오의 스튜디오에서 도제로 일하던 젊은 레오나르도가 받은 훈련은 이론보다 경험이었다. 그는 캔버스와 물감을 준비하는 법을 배웠으며 원근법을 처음으로 배웠다. 조각과 청동 주물 작업, 금세 공 기술의 비법을 전수받았으며 직접 관찰을 통해서 식물의 구조와 동물과 인체의 해부학을 연구하도록 격려받았다. 이로써 레오나르 도는 실용적인 태도를 가지고 성장할수 있었다.
레오나르도의 실용적인 태도와 날카로운 지성 호기심, 독립 정 신은 그로 하여금 당시의 이론과 도그마에 많은 부분 회의를 품게 했다. 예를 들면 지질학을 연구하던 중 그는 롬바르디의 산 정상에 서 화석과 조개 껍데기를 발견했다. 〈코텍스 레스터〉에서 그는 이런 것들이 산 위에 있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홍수 때문이라는 당시의 보편적인 견해에 단호하게 도전했다.
레오나르도는 이론에 근거하지 않고 논리적인 사고와 실생활의 경험에 근거해서 자기 주장을 폈다. 인습적인 지혜의 기반인 가설들 에 대해 논쟁을 벌이면서 그는 마침내 ‘이성을 가진 두뇌 속데 그 런 견해는 도저히 자리잡을 수 없다.’ 라는 결론을 냈다. 지질학을 연구하면서 레오나르도는 롬바르디의 언덕을 걷다가화석을 발견하 게 됐다.
또 해부학을 연구할 때 3O구 이상의 인체와 수없이 많은동물을 절개했다. 화석을 연구했을 때처럼 그의 해부학 연구도 당시의 권 위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제시한 증거가, 경험하지 않고 그저 판단에 의해 내린 존경받는 권위자들의 이론에 반대된다고 하여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 을 것이다. 그들은 내 연구가 단순하고 명료한 경험에 의한 것이란 점은 고려하지 않는다.’
레오나르도는 평생 동안 자신을 ‘글줄을 믿지 않는 사람’ 이자 경험의 사도’라고 칭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보기에 경험에 서 탄생하지 않은 과학은 쓸모 없고 실수투성이이다. 경험이야말로 모든 확신의 어머니이다. 창의성이나 수단 목적이 있는 직접 경험 은 다섯 군데 감각 기관중 한군데를 지나갔다.’ 레오나르도는 창의적이고 독립적인 사고 방식의 옹호자였다. 그 는 “다른 사람의 방식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 왜냐 하면 남의 방식 을 모방한 사람은 자연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라 불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라고말했다. 그는 또 “자연이 형성하는 것의 풍요로움을 염두에 둘 때 자연에 곧바로 다가가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했다. 이렇듯 모방을 거부하고 권위에 도전하고 스스로 생각하려는 레오 나르도의 의지는 나이에 상관없이 어느 때나 확연했다. 그리고 윌리 엄 맨체스터도 강조했듯 레오나르도가 ‘모든 지식은 이미 밝혀졌 다.’라고 생각했던 시대에 살았다는 점을 염두한다면 그가 그런 태 도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 정말 놀라울 뿐이다.
또 레오나르도는 위선적이지 않은 사상가였으며 미신을 믿지 않 는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연금술과 천문학에 관심을 갖는 것을 경험과 창의력의 적으로 보았다. 그리고 '천문학자들이 모두 제거 될 날'을고대했다. 학자와 학문의 전통을 비판적으로 봤던 그였지만, 소중한 면까지 다 버리지는 않았다. 예를들면 그는 1494년 마혼두 살의 나이에 고 전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라틴어를 독학했다. 그리고 자 신의 서가에 성경 이솝 우화 디오게네스(BC412?~BC323 옛 그리스 철학자), 오비디우스(BC43~AD17? 로마의 시인), 단테, 페트라르카 (14세기 이탈리아의 시인)의 작품을 비롯해서 농업과 해부학, 수학, 의학 전쟁에 관한 책들을소장했다고 한다.
다 빈치 학자인 에드워드 맥커디 교수는 ‘그는 관심 있는 주제에 관해 구할 수 있는 모든 고전을 구하고 중세의 문헌을 공부하는 습 관이 있었다.’ 라고 강조한다.
레오나르도는 브라만테, 마기아벨리, 루카 파치올리, 마르칸토니 오 델라 테레를 포함해 위대한 지성들과 교제했다. 그는 타인의 저 서를 대리 경험’으로 보았고 비판적으로 꼼꼼히 연구하고, 결국 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실험해 봐야한다고 믿었다.
레오나르도는 선입견과 책에 나오는 편견’ 이 과학적인 의문을 던지는 데 얼마나 제한을 가하는지 알았다. 그리고 경험에서 배우는 것은 곧 실수에서 배우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경험에는 실수 가 없다. 다만 경험에서 비롯되지 않은 결과를 짐작하는 것이 실수 일 뿐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시대를 망라해서 가장 뛰어난 천재로 인식되고 있는 다 빈치 역시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가장 눈에 띄는 실수로는 〈안기아 리의 전투〉와 〈최후의 만찬〉에서 물감올 붙이는 실험이 실패로 돌아간 일, 피렌체 여태후의 후원을 받아 실험한 아르노 강물을 돌리 려던 시도, 땅에서 이륙하지 못했던 비행 기구 실험을 꼽을수 있다. 특히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주방을 자동화하려는 계획은 엄청난 실패로 끝나버렸다. 레오나르도는 대규모 연회의 수석 주방장을 맡 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2백 명이 넘는 손님에게 각 코스마다 조각품 같은 요리를 대접하려는 어마어마한 계획을 세웠다.
접시는 축소 미술품으로 디자인되었다. 레오나르도는 보다 강력 한 새 스토브와 접시를 운반하는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을 설치했으 며, 화재에 대비해서 대형 스프링클러 시스템을 설치하기도 했다. 한데 연회가 열리던 날, 모든 게 엉망이 되어 버렸다. 주방에서 일하 는 하인들은 레오나르도의 요구대로 음식을 섬세하게 자르지 못했 다. 그래서 그는 백 명 이상의 미술가 친구들을 불러서 도움을 청하 게 되었다. 그러자 주방은 북새통을 이루었고 컨베이어 시스템은 작 동이 되지 않은데다 결국 화재까지 일어났다. 스프링클러의 작통이 너무 잘된 나머지 음식은 물에 휩쓸려버렸고, 주방 안에 물난리가 나버렸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실수와 사고, 실패, 좌절감에도 아 랑곳하지 않고 배우고 탐구하고 실험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지식을 추구하는 데 있어 초인적인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 는 노트에 쟁기를 그리고 옆에 '내 밭에서 떠나지 않겠다.' 라고 썼 다. 또 다른 곳에는 장애물이 나를 꺽지 못한다.’ ‘어떤 장애든 고 된 노력으로 극복된다.’ 라고 써 놓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자연과 인간에 대한 놀라운 작품들〉의 집 필자 마틴 캠프는 이렇게 말한다. ‘레오나르도가 어떤 원칙을 경작 하고 싶은 밭으로 보았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그 원칙 은 그가 ‘경험’ 이라고 이름붙인 것이었다.’
'예술가 > 안미숙_게시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상남,,,,,,,사진 (0) | 2003.04.27 |
---|---|
천경자 (0) | 2003.04.22 |
고흐탄생150 주년을 기리며... (0) | 2003.04.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