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빛으로 보다
박상남 사진
박상남_식물, 빛으로 보다 28_흑백인화_2002
이처럼 말하기 어려운 사진이 또 있을까? 단지 장식적이지도 않고,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보임이 서투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도 보이지 않고, 사진 안에 물체가 없지도 않고, 완전하게 비어있지도 않고, 보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도 않고, 하지만 차갑고 메마르게 하지도 않는 이 사진들 앞에서 나는 잠시 망연하다. 그리고 새삼 이 사진들이 가지는 이미지로서의 목적은 무엇일까? 하는 물음을 가져본다. ● 지금 우리의 사회 안에서, 이미지가 소비되어지면서 만들어지는 의미의 파장은 물가에 띄워진 버들잎이 만들어내는 문양정도이다. 그만큼 미비하다. 이미 너무도 많은 이미지가 너무도 아무렇지도 않게 무작정 소비되어지기에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의 함수관계를 생각해 보는 일조차도 단순한 소비처럼 느껴진다. 나아가, 앞으로 전개될 미래사회를 엿보아도 이 이미지의 잉여생산과 잉여소비는 불을 보듯 확연하다. 이는 빌렘 후루서Vilem Frusserrk 가 그의 책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 Fuer eine Philosophy der Fotografie'에서 지적한 것처럼, 인간 문화의 두 대립되는 전환점 중 두 번째인 기술적 영상의 발명? ?기인(빌렘 후루서Vilem Frusser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 Fuer eine Philosophy der Fotography' European Photography출판사. 1983년, p.7_이 책의 서문에서 후루서는 태초로부터 인간의 문화에는 두개의 대립되는 전환점이 존재한다고 전제하고, 그 첫 번째 전환점은 기원전 2000년 중반에 있었던 선형의 문자이고, 두 번째의 전환점은 기술적 영상의 발명이라고 강조한다. 이 두 번째의 전환점이 기술적 영상의 발명이란 다름 아닌 1839년 프랑스에서 공인된 사진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사진의 발명으로 선형으로 된 문자를 사용하는 대신 기술적인 영상을 가지고 자신들의 생각을 주고받는 시대가 되었음을 넘어, 이제는 그 만들어진 기술적 영상이 범람하는, 그리하여, 그 이미지가 오히려 현실을 거꾸로 대신하고, 급기야는 그 기술적 영상과 현실의 문제가 마치 꽈배기의 형상처럼 한 몸에 두 가닥처럼 꼬아져서 함께 보이거나, 구분을 할 수 없는 그런 모습으로 만들어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 이처럼 이미지의 소비가 넘쳐나는 시대에 우리가 여전히 작업을 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생산해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틘떫?이에 대한 대답은 작가마다 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만들어지는 이미지가 여하한 맥락을 가지고 사회 속에서 나름의 역할을 해야함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사회적이든 역사적 의미든 말이다.
박상남_식물, 빛으로 보다 09_흑백인화_2002
박상남_식물, 빛으로 보다 19_흑백인화_2002
박상남_식물, 빛으로 보다 05_흑백인화_2002
박상남_식물, 빛으로 보다 27_흑백인화_2002
지금 이 박상남의 사진 식물, 빛으로보다는 톤으로 보면 매우 미니멀하면서도, 형태로 보면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진 안에 담겨있는 사물들은 제목에서 시사하는 것처럼 다 식물들이다. 어쩌면, 인간의 진화에 결정적인 조상 역할을 했을지 모르는(적어도 DNA적으로는) 저 식물들을 그는 빛이 들어오는 창문에 다시 식물질로 만들어진 한지를 바르고, 그 위에서 작업을 하였다. 이러한 작업의 태도는 우리가 그동안 해왔던, 혹은 알고 있던, 사물을 바라보는 행위에 역습을 가하는 부분이 있다. ● 그러니까, 우리가 무엇을 본다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 사물에 반사되어진 빛이 우리의 동공을 지나 각막에 흔적을 남기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가 사물을 본다는 것은, 보는 것이라 하기보다는 빛이 매개하여 그 사물이 자신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라 해야 보다 적확한 표현이 된다. 더구나, 단지 보는 것에서 나아가 인식하는 문제까지 곁들이면, 우리가 능동적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그에 대한 반응을 해온 것이 얼마나 수동적인 태도였는지를 알 수가 있다. 즉, 보는 것은 각막에서 끝이 나고, 다시 그 본 것이 무엇이냐? ?알게 되는 일은 눈의 구조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고, 그 빛의 충격이 시신경을 타고 뇌에 전달되어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어느 사실에 자극을 주고, 그 자극에 의해 본 사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됨을 생각해보면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보는 문제를 우리 조상들은 시각이라고 했다. 볼 시와 깨달을 각으로 말이다. ● 나아가 자끄 라깡이 제시하고 있는 시선의 문제도 이 지점을 통과해서 발생한다. 그가 예를 든 대로, 바닷가 물위에 떠있는 정어리 깡통의 빛나는 모습도 단지 내가 그 정어리 깡통을 바라보고 있다고만 할 수 없고, 그 깡통에 반사되는 빛이 내게 달려와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도 해야한다. 즉 보고 있는 나와 보여지고 있는 나, 시선(eye)과 보여짐(gaze)이 함께 중첩되어있는 상태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크 라캉, 욕망이론, 권택영 엮음, 민승기, 이미선, 권택영 옮김, 문예출판사. p.31~32. 1994년) 인간이 어떤 대상을 주체적으로 본다는 것은, 상상계를 통과해온 인간이 본래적으로 모순되기에 불가능한 것이라 이해하면서 그 상상계가 이 후 상징계와 혼합되어 실제계로 나아간다 함은 내가 주체적으로 대상을 바라보기! 만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보여지기도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시각의 상호성은 자아의 상호 존중과도 관계가 있음을 밝히는 대목이다. ● 박상남 역시도 자신의 소재들을 단지 반사되는 빛으로만 읽어나간 것이 아니다. 그와 더불어 소재들을 통과해서 카메라 쪽으로 돌진해 오는 빛을 함께 본 것이다. 하여, 몇 개의 사진들에서는 일부분 그 소재들이 투명하게 보이고, 그리고 나머지 일부는 진한 색을 띄면서 반사된 빛에 의해 보여짐을 강조함이 동시에 전개되고 있다. (사진 「식물, 빛으로 보다 07~13」)
박상남_식물, 빛으로 보다 24_흑백인화_2002
박상남_식물, 빛으로 보다 20_흑백인화_2002
박상남_식물, 빛으로 보다 15_흑백인화_2002
박상남_식물, 빛으로 보다 04_흑백인화_2002
뿐만 아니라 지금 박상남이 사진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하는 문제가 단지 식물의 어느 부분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전공한(그는 생물학을 전공했다.)분야를 십분 활용하여 스스로가 잘 알고 있는 사물들에 빛의 문제를 개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식물과 빛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식물은 빛과 물과 공기의 힘으로 생장한다. 그중에서도 빛은 식물과 작용하여 엽록소를 방사하고, 식물이 단지 자신의 존재만을 생존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공생하고 있는 다른 동물들에게도 산소를 공급하면서 전체 자연계 공동의 삶을 영위케 한다. 즉, 식물의 생존이 다른 계의 삶에 투영되는 것이다. 이러한 식물의 공공한 삶은 그 식물에 무형(적어도 가시광역 안에서는)의 빛이 공급됨으로서 가능해진다. 그러니까 빛은 무형으로 다가와 유형으로 기여하는 것이다. ● 우리는 사진 안에 빛이 두개의 축으로 존재함을 본다. 하나는 촬영하는 당시 사물이 카메라 안으로 들어오게 해주는 매개로서의 역할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필름과 인화지가 머금은 빛을 다시 사물되이 만드는 현상액이 빛으로 역할을 한다. (사진가에게 있어서! 현상액이란 액체로 된 빛이다.) 공간에 사물이 존재하는 그 자체는 마치 필름이 그저 빛을 머금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 공간 안에 빛이 개입하여 그 사물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없는 한 인간은 그 사물을 볼 수 없다. 마치 잠재된 상이 아무리 필름에 잔뜩 각인되어 있어도 그것이 현상되지 않으면 절대로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 이러한 빛의 역할은 사진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한다. 특히나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박상남의 사진들은 이러한 빛이 가지는 사진과의 역학관계가 매우 적실하게 이용되고 있음을 본다. ● 사진 「식물, 빛으로 보다 01~06」까지를 잘 살펴보면, 이러한 빛과 대상이 혼합되어진 상황을 잘 읽을 수 있다. 사물에 번지는 빛이 상호 교호되어 산란하고, 그 힘은 다시 사물이 가지는 형태감을 다소 감축시키면서 사물은 단지 식물이라는 정보값으로부터 새롭게 사물화 되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 안의 사물들은 빛이 만든 궤적을 가지게 되고, 그로인해 사물 본래의 모습이 흩어지는 현상도 읽을 수 있게 해준다. 그럼으로써 사진 속의 사물은 이제 새로운 모습으로 ! 보인다. 바람일 수도 있고, 시간의 흔적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언뜻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어 마치 물먹은 산수처럼 보이게 하기도 한다. 여전히 빛이라고 하는 절대적인 리얼리즘을 간직한 채 말이다
박상남 사진
박상남_식물, 빛으로 보다 28_흑백인화_2002
이처럼 말하기 어려운 사진이 또 있을까? 단지 장식적이지도 않고,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보임이 서투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도 보이지 않고, 사진 안에 물체가 없지도 않고, 완전하게 비어있지도 않고, 보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도 않고, 하지만 차갑고 메마르게 하지도 않는 이 사진들 앞에서 나는 잠시 망연하다. 그리고 새삼 이 사진들이 가지는 이미지로서의 목적은 무엇일까? 하는 물음을 가져본다. ● 지금 우리의 사회 안에서, 이미지가 소비되어지면서 만들어지는 의미의 파장은 물가에 띄워진 버들잎이 만들어내는 문양정도이다. 그만큼 미비하다. 이미 너무도 많은 이미지가 너무도 아무렇지도 않게 무작정 소비되어지기에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의 함수관계를 생각해 보는 일조차도 단순한 소비처럼 느껴진다. 나아가, 앞으로 전개될 미래사회를 엿보아도 이 이미지의 잉여생산과 잉여소비는 불을 보듯 확연하다. 이는 빌렘 후루서Vilem Frusserrk 가 그의 책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 Fuer eine Philosophy der Fotografie'에서 지적한 것처럼, 인간 문화의 두 대립되는 전환점 중 두 번째인 기술적 영상의 발명? ?기인(빌렘 후루서Vilem Frusser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 Fuer eine Philosophy der Fotography' European Photography출판사. 1983년, p.7_이 책의 서문에서 후루서는 태초로부터 인간의 문화에는 두개의 대립되는 전환점이 존재한다고 전제하고, 그 첫 번째 전환점은 기원전 2000년 중반에 있었던 선형의 문자이고, 두 번째의 전환점은 기술적 영상의 발명이라고 강조한다. 이 두 번째의 전환점이 기술적 영상의 발명이란 다름 아닌 1839년 프랑스에서 공인된 사진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사진의 발명으로 선형으로 된 문자를 사용하는 대신 기술적인 영상을 가지고 자신들의 생각을 주고받는 시대가 되었음을 넘어, 이제는 그 만들어진 기술적 영상이 범람하는, 그리하여, 그 이미지가 오히려 현실을 거꾸로 대신하고, 급기야는 그 기술적 영상과 현실의 문제가 마치 꽈배기의 형상처럼 한 몸에 두 가닥처럼 꼬아져서 함께 보이거나, 구분을 할 수 없는 그런 모습으로 만들어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 이처럼 이미지의 소비가 넘쳐나는 시대에 우리가 여전히 작업을 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생산해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틘떫?이에 대한 대답은 작가마다 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만들어지는 이미지가 여하한 맥락을 가지고 사회 속에서 나름의 역할을 해야함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사회적이든 역사적 의미든 말이다.
박상남_식물, 빛으로 보다 09_흑백인화_2002
박상남_식물, 빛으로 보다 19_흑백인화_2002
박상남_식물, 빛으로 보다 05_흑백인화_2002
박상남_식물, 빛으로 보다 27_흑백인화_2002
지금 이 박상남의 사진 식물, 빛으로보다는 톤으로 보면 매우 미니멀하면서도, 형태로 보면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진 안에 담겨있는 사물들은 제목에서 시사하는 것처럼 다 식물들이다. 어쩌면, 인간의 진화에 결정적인 조상 역할을 했을지 모르는(적어도 DNA적으로는) 저 식물들을 그는 빛이 들어오는 창문에 다시 식물질로 만들어진 한지를 바르고, 그 위에서 작업을 하였다. 이러한 작업의 태도는 우리가 그동안 해왔던, 혹은 알고 있던, 사물을 바라보는 행위에 역습을 가하는 부분이 있다. ● 그러니까, 우리가 무엇을 본다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 사물에 반사되어진 빛이 우리의 동공을 지나 각막에 흔적을 남기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가 사물을 본다는 것은, 보는 것이라 하기보다는 빛이 매개하여 그 사물이 자신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라 해야 보다 적확한 표현이 된다. 더구나, 단지 보는 것에서 나아가 인식하는 문제까지 곁들이면, 우리가 능동적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그에 대한 반응을 해온 것이 얼마나 수동적인 태도였는지를 알 수가 있다. 즉, 보는 것은 각막에서 끝이 나고, 다시 그 본 것이 무엇이냐? ?알게 되는 일은 눈의 구조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고, 그 빛의 충격이 시신경을 타고 뇌에 전달되어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어느 사실에 자극을 주고, 그 자극에 의해 본 사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됨을 생각해보면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보는 문제를 우리 조상들은 시각이라고 했다. 볼 시와 깨달을 각으로 말이다. ● 나아가 자끄 라깡이 제시하고 있는 시선의 문제도 이 지점을 통과해서 발생한다. 그가 예를 든 대로, 바닷가 물위에 떠있는 정어리 깡통의 빛나는 모습도 단지 내가 그 정어리 깡통을 바라보고 있다고만 할 수 없고, 그 깡통에 반사되는 빛이 내게 달려와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도 해야한다. 즉 보고 있는 나와 보여지고 있는 나, 시선(eye)과 보여짐(gaze)이 함께 중첩되어있는 상태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크 라캉, 욕망이론, 권택영 엮음, 민승기, 이미선, 권택영 옮김, 문예출판사. p.31~32. 1994년) 인간이 어떤 대상을 주체적으로 본다는 것은, 상상계를 통과해온 인간이 본래적으로 모순되기에 불가능한 것이라 이해하면서 그 상상계가 이 후 상징계와 혼합되어 실제계로 나아간다 함은 내가 주체적으로 대상을 바라보기! 만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보여지기도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시각의 상호성은 자아의 상호 존중과도 관계가 있음을 밝히는 대목이다. ● 박상남 역시도 자신의 소재들을 단지 반사되는 빛으로만 읽어나간 것이 아니다. 그와 더불어 소재들을 통과해서 카메라 쪽으로 돌진해 오는 빛을 함께 본 것이다. 하여, 몇 개의 사진들에서는 일부분 그 소재들이 투명하게 보이고, 그리고 나머지 일부는 진한 색을 띄면서 반사된 빛에 의해 보여짐을 강조함이 동시에 전개되고 있다. (사진 「식물, 빛으로 보다 07~13」)
박상남_식물, 빛으로 보다 24_흑백인화_2002
박상남_식물, 빛으로 보다 20_흑백인화_2002
박상남_식물, 빛으로 보다 15_흑백인화_2002
박상남_식물, 빛으로 보다 04_흑백인화_2002
뿐만 아니라 지금 박상남이 사진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하는 문제가 단지 식물의 어느 부분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전공한(그는 생물학을 전공했다.)분야를 십분 활용하여 스스로가 잘 알고 있는 사물들에 빛의 문제를 개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식물과 빛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식물은 빛과 물과 공기의 힘으로 생장한다. 그중에서도 빛은 식물과 작용하여 엽록소를 방사하고, 식물이 단지 자신의 존재만을 생존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공생하고 있는 다른 동물들에게도 산소를 공급하면서 전체 자연계 공동의 삶을 영위케 한다. 즉, 식물의 생존이 다른 계의 삶에 투영되는 것이다. 이러한 식물의 공공한 삶은 그 식물에 무형(적어도 가시광역 안에서는)의 빛이 공급됨으로서 가능해진다. 그러니까 빛은 무형으로 다가와 유형으로 기여하는 것이다. ● 우리는 사진 안에 빛이 두개의 축으로 존재함을 본다. 하나는 촬영하는 당시 사물이 카메라 안으로 들어오게 해주는 매개로서의 역할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필름과 인화지가 머금은 빛을 다시 사물되이 만드는 현상액이 빛으로 역할을 한다. (사진가에게 있어서! 현상액이란 액체로 된 빛이다.) 공간에 사물이 존재하는 그 자체는 마치 필름이 그저 빛을 머금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 공간 안에 빛이 개입하여 그 사물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없는 한 인간은 그 사물을 볼 수 없다. 마치 잠재된 상이 아무리 필름에 잔뜩 각인되어 있어도 그것이 현상되지 않으면 절대로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 이러한 빛의 역할은 사진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한다. 특히나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박상남의 사진들은 이러한 빛이 가지는 사진과의 역학관계가 매우 적실하게 이용되고 있음을 본다. ● 사진 「식물, 빛으로 보다 01~06」까지를 잘 살펴보면, 이러한 빛과 대상이 혼합되어진 상황을 잘 읽을 수 있다. 사물에 번지는 빛이 상호 교호되어 산란하고, 그 힘은 다시 사물이 가지는 형태감을 다소 감축시키면서 사물은 단지 식물이라는 정보값으로부터 새롭게 사물화 되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 안의 사물들은 빛이 만든 궤적을 가지게 되고, 그로인해 사물 본래의 모습이 흩어지는 현상도 읽을 수 있게 해준다. 그럼으로써 사진 속의 사물은 이제 새로운 모습으로 ! 보인다. 바람일 수도 있고, 시간의 흔적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언뜻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어 마치 물먹은 산수처럼 보이게 하기도 한다. 여전히 빛이라고 하는 절대적인 리얼리즘을 간직한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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