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의 경우에는 인쇄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실물과 인쇄물이 현격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베토벤 교향곡의 실황연주를 집에서 제대로 갖춘 오디오로 듣는 것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좋은 화집으로 보는 것 사이에는 상대적으로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미술은 작품의 재료와 크기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데 그것이 화집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작품을 집에 소장하는 사람이 극소수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작품을 직접 보기 위해선 전시장으로 나가야 한다. 미술관이나 화랑은 감상을 위해 조명, 작품배치, 음향 등에 신경을 쓴 공간이기 때문에 집중해서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무엇보다 그림을 자주 접하는 과정에서 의식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친밀감을 갖게 될 것이고 그러면서 자신의 눈에 대한 자신감도 생기게 될 것이기 때문에, 전시장 관람은 초보자들에게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미술관이나 화랑에 가기 위해선 우선 사전에 전시정보를 알아보는 게 좋다. 요즘은 해외 미술관 관람을 겨냥한 테마여행이 잦아지고 있으며 국내의 전시공간도 계속 확대되는 추세여서 과거처럼 정보가 부족한 시대는 아니다. 미술사 일반을 다루는 전시인지 아니면 특수한 주제에 관한 전시인지, 또 개인전의 경우 대략 어떤 화풍으로 어떤 주제를 다루는 것인지를 알아야만 자신의 관심에 보다 잘 들어맞는 전시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서울의 경우 인사동이나 강남의 몇 지역에 화랑들이 몰려있고, 대개 매주 수요일이나 금요일에 전시회 오프닝을 하니까 날짜를 맞추어 한바퀴 빙 돌며 감상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또한 전시장의 성격을 파악함으로 다음 방문때 도움이 되도록 하자. 혼자 가는 것보다는 몇 사람이 함께 가서 그림을 보고 느낀 점, 알아낸 것에 관해 가능한 자세하게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좋다. 시각은 주관적인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볼 확률이 상당히 높다. 전시회의 팜플렛 서문 등을 참조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것은 관람 후에라도 할 수 있으므로, 현장의 느낌과 판단을 '스폰지처럼' 흡수하는데 감각을 집중하는 것이 우선 할 일이다. 시간을 갖고 천천히 관람하면서 특별한 느낌이나 생각이 들었던 작품은 세부묘사까지 눈여겨 보고 기억해두자. 그 당시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나중에 문득 떠오르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도 함께 기록해 두면 결국 작품의 여러 층위를 건드리는 것이 된다. 이렇게 몇 차례 반복하다보면 자기 나름대로 전시장을 관람하는 방식을 체득하게 될 것이다.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과 보는 방법 그리고 즐기는 방식이 사람마다 다르듯이 자신의 조건과 성향에 맞추어 전시를 즐기는 방법을 발굴하자. 또한 자신의 관람 방법과 감상 결과에 대해 자신에게는 물론 남에게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미술이야말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될 우려가 매우 높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그것을 소통해가는 과정은 특히 중요하다.
작품은 그저 전시되기 위해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관람하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주눅이 들어 제대로 작품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말아야겠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관객들이 직접 만져보거나 작동하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작품들도 상당수 등장하고 있다. 뚜껑을 열어보거나 단추를 누르거나 작품 속을 통과하거나 해야 하는데도 그냥 지나쳐버려 작품을 이해할 기회를 놓쳐서는 안되겠다.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중요시 하는 것은 현대미술의 중요한 추세 중 하나이다. 문제는 그 상호작용이 매우 까다롭고 어려운 절차를 거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을 다치게 하지 않는 한 가까이 다가가서 보고 만지고 심지어 냄새도 맡아보고 하는 기회를 적극적으로 만들어 볼 필요가 있다. 필요하다면 전시장의 큐레이터나 안내인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한 방법. 전시장에서의 사진 촬영도 마찬가지이다. 카메라의 강한 플래시 때문에 감상에 방해가 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양해를 받고 사진촬영을 하는 것도 무방하다. 아직도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라는 표지가 우리를 심리적으로 가로막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단지 특정한 작품의 보존을 위한 형식적 절차일 뿐이라는 점을 기억해두자. 좀 과격하게 표현하면 작품은 손대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하게 해부해야 할 대상이다. 현대미술은 결코 우리에게 자신을 솔직하고 친절하게 드러내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자.
주변에서 사람들은 쉽게 '추상미술', '비구상미술' 혹은 '반추상미술'이라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추상'이라는 말조차 낯선 우리들은 이런 말들을 구분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추상미술은 자연물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 미술이다. 일반인들이 알 수 있는 대상(사람, 꽃, 동물 등)이 그려지지 않기 때문에 선뜻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비구상'이라는 것은 '추상'의 한 종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추상은 기존의 미술이 갖는 재현적인 요소로부터 탈피하는데서 시작되는데, 아예 처음부터 작가가 재현의 대상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려낸 것은 비대상 미술, 어떠한 대상을 작가의 의도적인 왜곡으로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표현한 것을 비구상미술이라고 하며 이런 것 등을 통틀어 '추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럼 '반추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추상화되는 정도의 문제에서 나누어진 경계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반추상'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추상화의 정도가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일정정도 표현의 대상 형태를 화면에서 알아볼 수 있는 정도의 그림을 말한다. 1890년 모리스 드니는 '회화는 전쟁터의 말이나 나부이기 이전에 질서를 가진 색채로 덮여진 평면이다'이라고 했는데 이는 회화가 지금까지 사물의 묘사에 치중했던 것을 벗어나는 상징적인 말이다. 미술사에서 추상 미술의 발전 경로를 보면, 20세기에 들어와 야수파는 색채의 해방을 주장하고, 큐비즘은 사물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하여 평면에 담았고 미래파는 스피드한 시각언어를 보여주었다. 한편 러시아 구성주의,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 감정의 표현을 다룬 뜨거운 추상, 차가운 추상 등등 무수한 추상 미술의 갈래들이 생겨났다.
작품은 그저 전시되기 위해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관람하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주눅이 들어 제대로 작품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말아야겠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관객들이 직접 만져보거나 작동하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작품들도 상당수 등장하고 있다. 뚜껑을 열어보거나 단추를 누르거나 작품 속을 통과하거나 해야 하는데도 그냥 지나쳐버려 작품을 이해할 기회를 놓쳐서는 안되겠다.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중요시 하는 것은 현대미술의 중요한 추세 중 하나이다. 문제는 그 상호작용이 매우 까다롭고 어려운 절차를 거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을 다치게 하지 않는 한 가까이 다가가서 보고 만지고 심지어 냄새도 맡아보고 하는 기회를 적극적으로 만들어 볼 필요가 있다. 필요하다면 전시장의 큐레이터나 안내인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한 방법. 전시장에서의 사진 촬영도 마찬가지이다. 카메라의 강한 플래시 때문에 감상에 방해가 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양해를 받고 사진촬영을 하는 것도 무방하다. 아직도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라는 표지가 우리를 심리적으로 가로막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단지 특정한 작품의 보존을 위한 형식적 절차일 뿐이라는 점을 기억해두자. 좀 과격하게 표현하면 작품은 손대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하게 해부해야 할 대상이다. 현대미술은 결코 우리에게 자신을 솔직하고 친절하게 드러내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자.
주변에서 사람들은 쉽게 '추상미술', '비구상미술' 혹은 '반추상미술'이라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추상'이라는 말조차 낯선 우리들은 이런 말들을 구분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추상미술은 자연물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 미술이다. 일반인들이 알 수 있는 대상(사람, 꽃, 동물 등)이 그려지지 않기 때문에 선뜻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비구상'이라는 것은 '추상'의 한 종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추상은 기존의 미술이 갖는 재현적인 요소로부터 탈피하는데서 시작되는데, 아예 처음부터 작가가 재현의 대상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려낸 것은 비대상 미술, 어떠한 대상을 작가의 의도적인 왜곡으로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표현한 것을 비구상미술이라고 하며 이런 것 등을 통틀어 '추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럼 '반추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추상화되는 정도의 문제에서 나누어진 경계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반추상'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추상화의 정도가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일정정도 표현의 대상 형태를 화면에서 알아볼 수 있는 정도의 그림을 말한다. 1890년 모리스 드니는 '회화는 전쟁터의 말이나 나부이기 이전에 질서를 가진 색채로 덮여진 평면이다'이라고 했는데 이는 회화가 지금까지 사물의 묘사에 치중했던 것을 벗어나는 상징적인 말이다. 미술사에서 추상 미술의 발전 경로를 보면, 20세기에 들어와 야수파는 색채의 해방을 주장하고, 큐비즘은 사물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하여 평면에 담았고 미래파는 스피드한 시각언어를 보여주었다. 한편 러시아 구성주의,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 감정의 표현을 다룬 뜨거운 추상, 차가운 추상 등등 무수한 추상 미술의 갈래들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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