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에게
네 생일을 맞아, 늘 건강하고 마음에 평화가 가득하기를 간
절히 기원한다.
오늘에 맞춰 유화<감자 먹는 사람들>을 보내고 싶었는데,작
업이 잘 진행되긴 하지만 완성하지는 못했다. 최종 그림은
기억을 더듬어 그리니 비교적 짧은 시간에 완성되겠지만,
겨울 내내 이 그림을 위해 머리와 손 그리는 연습을 해왔다.
강한 열의를 갖고 작업에 임했기에, 며칠 동안은 치열한
전투를 치르는 것 같았다. 가끔은 그림이 완성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두렵기도 했다.그러나 그림을 그린다
는 게 뭐냐. '행동하고 창조하는 것' 아니냐.
<감자 먹는 사람들>은 황금색과 잘 어울릴 것이다. 혹은 짙
게 그늘진 잘익은 곡물 색의 벽지를 바른 벽 위에 걸어놓아
도 잘 어울릴 것이다. 그러나 이런식으로 배치하지 않고 그
림을 보여서는 안 된다.
특히 어둡거나 흐린 배경에서는 이 작품의 장점이 잘 드러
나지 않을 것이다. 그림의 내용이 아주 어두운 회색조의 실
내를 들여다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삶 속에서도,램프
가 하얀 벽 위로 뿜어내는 열기와 불빛은 관찰자에게 더 가
깝기 때문에, 전체 장면을 황금색 불빛 속에서 보게 된다.
물론 관객은 그림 바깥에 있다. 그러나 자연스런 상태에서
그림 전체가 뒤쪽으로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그림은 주변에 짙은 황금색이나
구리빛이 칠해진채 놓여야 한다. 그 그림을 제대로 보고 싶
다면, 부디 내 말을 잊지 말아라. 그림을 황금빛 색조와 함
께 배치해야 그림이 더 잘 살아난다. 불행하게도 흐리거나
검은 배경에 놓인다면,대리석 같은 질감이 죽어버릴 것이
다. 그림자를 푸른색으로 칠했기 때문에 황금색이 이것을
돋보이게 해준다.
어제 에인트호벤에 사는 그림 그리는 친구의 집에 그 그림
을 가지고 갔다. 사흘 동안 그곳에 있으면서 그림에 달걀
흰자위를 칠하고, 약간의 세부손질을 해서 마무리하려 한
다.
친구는 색 다루는 법을 배우려고 아주 열심인데, <감자 먹
는 사람들>에 특히 매료되었다. 석판화를 제작하기 위해 그
렸던 습작을 이미 본 적이 있는 그 친구는 내가 색채와 데
생을 그정도로 잘 다루리라고는 믿지 않았다고 했다. 그도
모델을 두고 그리기 때문에 농부의 머리나 손, 손가락이 어
떠한지 잘 알고 있는데, 이제 그것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램프 불빛 아래에서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접시
로 내밀고 있는손, 자신을 닮은 바로 그 손으로 땅을 팠다
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려고 했다. 그 손은, 손으로 하는 노
동과 정직하게 노력해서 얻은 식사를 암시하고 있다.
이 그림을 통해 우리의 생활방식, 즉 문명화된 사람들의
생활방식과는 상당히 다른생활방식을 보여주고 싶었다. 사
람들이 영문도 모르는 채 그 그림에 감탄하고, 좋다고 인정
하는 것이 내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일이다. 그것을 위해 겨
울 내내 이 직물을 짜낼 다양한 색채의 실을 손에 쥐고서,
그 결정적인 짜임새를 찾아왔다. 아직은 다듬어지지 않고
거친 모양을 한 천에 불과하지만, 그 천을 진 실은
세심하게, 그리고 특정한 규칙에 따라 선택되었다.
언젠가는 <감자 먹는 사람들>이 진정한 농촌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감상적이고 나약하게 보이는 농부 그
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다른 대상을 찾겠지. 그러나 길게 봤
을 때는 농부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달콤하게 그리는 것보
다, 그들 특유의 거친 속성을 살려내는 것이 더 좋은 결과
를 낳을 것이다. 여기저기 기운 흔적이 있고 먼지로 뒤덮
인 푸른색 스커트와 상의를 입은 시골 처녀는 날씨와 바
람, 태양이 남긴 기묘한 그늘을 갖고 있을 때 숙녀보다 더
멋지게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숙녀들이 입는 옷을 걸
친다면, 그녀의 개성은 사라져버릴 것이다. 또한 농부는
일요일에 교회에 가려고 신사복을 차려입었을 때보다 작업
복을 입고 밭에 나가 있을 때가 더 좋아 보인다.
이와 비슷하게, 농부의 삶을 담은 그리을 전통적인 방식으
로 세련되게 그리는 것은 잘못이다. 농촌 그림이 베이컨,
연기, 찐 감자 냄새를 풍긴다고해서 비정상적인 게 아니
다.마구간 그림이 거름 때문에 악취를 풍긴다면 훌륭하다
고 해야겠지. 바로 그게 마구간이니까. 밭에서 잘 익은 옥
수수나 감자냄새, 비료냄새, 거름냄새가 난다면 지극히 건
강한 것이지. 특히 도시에 사는 사람들한테는 더욱 그렇
다. 그런 그림이 그들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일이 있어도 농촌생활을 다룬 그림에서 향수냄새가 나서는 않된다.
네가 이 그림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하게 될런지 궁금 하다.
그랬으면 좋겠다.
포르티에 씨가 내 그림을 취급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에게 습작보다 나은 것을 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다. 뒤
랑 뤼엘에게는. 비록 그가 데생이 그리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이 유화를 보이도록 해라.
그가 이 그림을 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로 내버려두렴.
상관없다. 그러나 그에게 그 그림을 한번 보여주기는 해라.
사람들에게 우리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어야
할 것 아니냐, 분명 "웬 쓰레기 같은 그림이냐!"는 말을
들을게 뻔하지만, 내가 각오하고 있듯 너도 각오해야 할 것
이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해서 진실하고 정직한 그림을 그
려야 한다.
농촌생활을 그리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그러나 예술과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진지한 반성을
하게 될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면,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다.
밀레나 드 그루 같은 화가들이 "더럽다, 저속하다, 추악하
다, 악취가난다"등등의 빈정거림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꾸
준히 작업하는 모범을 보였는데, 내가 그런 악평에 흔들린
다면 치욕이 될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되지. 농부를 그리려
면 자신이 농부인 것처럼 그려야 할 것이고, 농부가 느끼
고 생각하는 것을 똑같이 느끼고 생각하며 그려야 할 것이
다. 실제로 자신이 누구인가는 잊어야 한다. 자주 생각하
는 문제인데, 농부는 여러 가지 점에서 문명화된 세계보다
훨씬 더 나은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모든 점에서 그
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도대체 그들이 예술이나 다른 많은
것에 대해 알아야 할 이유가 있겠니?
더 작은 크기의 습작도 여럿 있다. 그러나 큰 작품을 그리
느라 바빠서 다른 그림을 많이 그리지 못했다는 건 너도 이
해하겠지. 그림이 완성되고 물감이 마르자마자 작은 습작
과 함께 너에게 보낼 생각이다. 발송을 너무 늦추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서두르고 있다. 그렇게 하려면, 그 그림
의 두번째 석판화는 포기해야 될 것 같다. 이 그림에 대한
포르티에 씨의 보증서를 받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 그림에 너무 빠져 지내느라 이사해야 한다는 것도 잊
을 뻔했다. 이사에도 신경을 써야 했는데, 이사 걱정을 하
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장르의 그림을 그리는 화가
는 워낙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다른 화가보다 더 편하게 지
내기를 바랄 수 없을 것 같다. 게다가 그들이 어떻게든 그
림을 그리는 이상 나도 물리적 어려움으로 잠시 주저할 수
는 있지만 '파괴되거나 침식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
나는 <감자 먹는 사람들>이 아주 줗은 작품이 되리라 믿는
다. 너도 알다시피, 근래 며칠간은 물감 때문에 고생했다.
물감이 완전히 마르기 전에는 그림을 망칠 각오를 하지 않고는
붓질 한번 마음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정할 때는 작은 붓으로 냉정하고 침착하게 해야
했다. 가끔 그림을 친구에게 가져가서, 혹시 내가 그림을
망치는 건 아닌지 물어본 것도, 마지막 손질을 그의 작업
실에 가서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너도 이 그림이 독창적이라는 걸 확실하게 알게 될 것이
다. 네 생일에 맞추지 못한 것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
1885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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