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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안미숙_게시판

들라크로와

에곤 드라크로와

Ferdinand Victor Eugone Delacroix (1798.4.26~1863.8.13)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샤랑트현(縣) 생 모리스 출생. 명문가 외교관의 아들로 명석하며 정열적인 상상력을 타고났다. 16세에 고전파 화가인 P.N.게랭에게 그림을 배웠고, 1816년 관립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게랑의 문하에는 유능한 청년들이 모여들었으나 무능한 게랭은 그들에게 아무영향도 줄 수 없었다. 동문 중에 특히 제리와 친해졌다. 이때부터 루브르미술관에 다니면서 P.P.루벤스, P.베로네제 등의 그림을 모사하였고, T.제리코의 작품에 매료되어 현실묘사에도 노력하였다. 19년 제리코가 발표한 《메두사호(號)의 뗏목:Raft of the Meduse》은 그에게 낭만주의를 수립하는 결정적인 감격과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22년 최초의 낭만주의 회화인 《단테의 작은 배》를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엿볼 수 있는 극적인 표현은 다비드풍(風)의 고전주의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계속하여 1824년에는 제리코가 승마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앵그르가 프랑스로 돌아왔고, 그리스의 독립전쟁에서 취재한 《키오스섬의 학살》을 발표하여 ‘회화의 학살’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하였지만, 다른사람들은 그것을 열광적으로 환영하여 들라크로와는 유명해 졌으며 힘찬 율동과 격정적 표현은 그의 낭만주의를 더욱 확립시켰다. 프랑스 대혁명은 개성해방의 추진에 새로운 힘을 불어 ,획득한 자유의 바탕위에 서서 새로운 질서를 향해 치닫는다. 그리고 나폴레옹 황제의 출현은 정치, 경제는 물론이고 예술에 이르기까지, 신질서를 확립하려고 했고, 따라서 19세기 초두는 이 영웅의 권위에 모든 것이 포괄되게 된다.



개성을 존중하고 감수성에 호소해서, 고전의 규범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제작하려는 움직임은 이미 고전주의 전성시대부터 나타나는데 다비드의 제자였던 그로는 스스로의 욕구와 스승의 꾸지람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한다.들라크로와의 대담한 색채와 정열적인 표현이 소묘의 명확, 파국의 균형 등 법칙만 요란하게 부르짖었던 고전주의와는 정반대 였으므로 일반으로부터는 격렬한 공격을 받았으나 소수의 화가 친구들은 일찍부터 그의 재능을 인정하였다.



이때 살롱의 똑같은 방안에 진열된 영국의 J.콘스터블의 풍경화의 밝은 색조에서 자극을 받고, 자기의 작품을 밝게 새로 칠하여 한층 더 강렬한 효과를 나타냈다. 다음해 런던에서 R.P.보닝턴, J.P.로런스 등과 사귀는 동안 더욱더 빛깔의 명도와 심도를 증가시켰다. 즉, 자신과 낭만주의 회화의 성숙기를 맞이한 것이다. 그의 제재는 광범위하여 종교·신화·문학·역사로부터 풍속·인물·풍경·정물 등의 전 영역에 걸쳤으며, 벽화장식을 포함한 유채화 853점 외에 데생화 6629점, 수채화·파스텔화 1505점, 판화류 133점, 화첩 60점에 이르는 작품을 제작하였고, 예술상의 깊은 성찰을 기술한 일기·평론·서간도 많이 남겼다.최초의 작품 《단테의 배(1822)》에서의 극적인 표현은 다비드파(派)의 고전주의와 충돌하였으며, 《키오스섬의 학살(1822)》에서는 현대사의 비참한 주제를 극적 작품으로 마무리하여 신낭만주의 양식의 출현을 결정적으로 제시했다. 그 뒤 《사르다나파르의 죽음(1831)》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1)》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입성(1840)》 등과 같은 걸작을 발표, 그의 풍부한 낭만주의적 예술을 확립하였다.




그는 냉담한 고전파 데생의 속박을 파괴하고, 강렬한 인체데생과 거기에 반항하는 자연 등을 동적인 구도로 종합하여 극적인 표현을 달성하였다. 색채를 중시하고 붓놀림을 가능한한 눈에 띄게 하여 강렬한 효과를 지향했으며, 때로는 보색관계에 주의해 색조 분할을 시도, 후에 나타나는 인상파로의 길을 열었다. 통제를 기피하여 개성의 해방과 고양을 추구하고, 회화의 예술적 본성을 잘 이해하여 개화(開花)에 주력한 그의 깊은 영향은 세잔·고호 등 후대의 뛰어난 화가들에게서 나타났다. 그의 회화는 <구상력의 예술>이며 <자연은 사전이다>라고 할 만큼 자연을 구사하고, 현실을 초월해 현실보다도 진실한 상상세계 속에서 늘 추구하던 인간의 위대한 모습, 영광·패잔 속에 있는 영웅적 노력의 자세를 그렸다. 또 자신이 좋아한 과거나 동시대의 역사 속에서 그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사건을 선택하여 제재로 삼고 구성했다. 이러한 풍경·구도·효과 등은 영국의 회화에서 적지않게 영향받은 것인데, 그의 문학적 교양과 함께 음악애호의 깊이를 반영하는 특색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쇼팽의 비장한 초상과 그의 자화상 등 혼까지 몰입된 작품을 남겼으며, 정물화·나부(裸婦)·풍속화 등도 다수 그렸는데, 사막의 아라비아인의 모습을 그린 작품 등에서 풍속화를 예술적으로 시각화하였다. 그 후에도 계속 진전하여 1932년 모르네 백작을 수반으로 하는 외교사절단을 수행한 모로코 여행을 통해, 근동 지방의 강한 색채와 풍속에서 깊은 감동을 받고, 그의 예술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는 동시에 그 후의 낭만주의 회화에서의 동방취미 풍속화의 기반을 닦았다. 명작 《알제의 여인들》(34)은 이 여행에서 얻은 훌륭한 성과였다. 뿐만 아니라 이때를 중심으로, 초기에 볼 수 있었던 외면적인 격렬한 맛이 점차 내면화되었다.




"차가운 정확성은 예술이 아니다. 그러한 기술은 완성된 기교는 보여주지만 거기엔 표현이 업다. 그렇기 때문에 가한 필세는 볼 수 있지만 , 불행하게도 나는 그 기교를 보고있으면 마음이 냉각되고 내 공상은 그 날개를 움추린다. 우리가 그려야할 것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물과 같은 것이다. 눈을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을 위해서 창작하는 것이다." 낭만주의는 중세 취미를 부흥함과 동시에 그리스도교적 제재를 취급하였는데, 그의 예술 중 가장 뛰어난 것도 이 부류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더욱이 문학적·음악적인 정서도 풍부하여 셰익스피어, 바이런, 괴테 등의 작품을 일찍부터 가까이하였고, 음악가 F.리스트와 당시의 여성문학가이던 G.상드와도 친하였다.



이와 같은 풍부한 재능과 환경은, 그에게 회화작품 외에도 오늘날 미술사상(美術史上) 귀중한 문헌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는 뛰어난 예술론이나 일기 등을 집필하게 하였다. 그의 예술형성에 전술(前述)한 화가 이외에도 16세기 베네치아파 화가인 미켈란젤로나 고야도 영향을 주었으며, 한편으로 그 자신의 영향은 그 후의 낭만주의 회화를 물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E.드가와 A.르누아르에게 직접 연결되는 점도 많다.

들라크로와는 초상화의 위촉은 별로받지 않았는데 , 그의 걸작은 가까운 친구라든가 폴란드의 유명한 작곡가 쇼팽과 같이 '낭만주의적 고뇌'에 희생된 친구를 그린 것이다. 이 그림에서 우리는 가장순수한 상태에 있는 낭만주의적 영웅의 모습, 즉 그로의'나폴레옹'과 '광인'이 혼성된 쇼팽자신이 자신의 천재의불에의해 소진된 모습을 볼 수있다. 후반기에는 교회와 파리의 공공건축물을 위한 대벽화 장식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국회 하원의 《국왕의 방》(33), 국회 하원도서관(44), 국회 상원도서관(45∼47), 파리시청의 《평화의 방》(49∼53, 소실), 루브르궁전의 《아폴로의 방》(49) 등을 잇달아 그렸고, 말년에 그는 동판화, 특히 석판학 제작에 몰두하여 흑백대조가 강조되고








한층 환상적 표현기교를 보인 《파우스트석판화집(1827)》 《햄릿석판화집(1843)》 등의 걸작품을 남겼다. 이 밖에 교회 벽화와 파리의 공공건축물을 위한 대벽화의 제작에도 힘써 《피에타(1844)》 《천사와 야곱의 힘 겨루기》 《성 미카엘 대천사》 《국왕의 방(1833)》 《평화의 방(1849∼53)》 및 《아폴로의 방(1849)》 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100년뒤에 돌아와 나의 그림에 대하여 세상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싶다고 말했다. 1863년 가정부 제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독신이었던 65세의 생애를 마쳤다.



들라크로아 Eugene Delacroix(1798∼1863)


1798년 4월 26일, 파리 근교 샬링턴에서 출생. 부친 샤를르는 정부의 고관으로, 마르세이유
보르도 지사 등을 역임했고, 모친 빅토르 우방과의 사이에서 4남매를 두었다는데, 들라크로 아는 막내.
1800년(2세) 부친이 로느주 지사가 되자 마르세이유로 이사.
1804년(6세) 부친이 지론도 주지사로 전임되자, 일가는 보르도로 이사. 들라크로아는 이때 음악에 눈을 뜬다.
1805년(7세) 부친, 64세로 사망.
1806년(8세) 파리 리세 앙페리알에 입학, 기숙생이 됨. 모친은 딸 집에서 거주. 들라크로아는 이때 처음으로 루브르 미술관의 미술품을 본다.
1807년(9세) 둘째 형, 앙리 들라크로아 전사.
1814년(16세) 바르몽에서 루앙을 여행하는 동안 고딕 건축에 큰 감명을 받음. 모친 사망.
1815년(17세) 리세 앙페리알을 중퇴. 파리에서 사는 누나집에서 삶. 화가인 숙부 소개로 고전파 화가 게랭의 아틀리에에 들어감. 이 아틀리에에서 선배 제리코와 알게 됨. 최초의 목판화와 리도그래프를 「르 미로아」지에 발표.
1816년(18세)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 피엘, 그르마르디, 스리에 등과 알게 됨.
1817년(19세) 누나 집에서 일하는 영국 아가씨 엘리자베드 소르타와 사랑에 빠진다.
1818년(20세) 베르나크가 별장에 있는 라 보와크스에 체재, 문학을 사랑하게 된다.
1819년(21세) 오르세몽 교회에 〈수확의 성모〉를 그림. 제리코의 〈메듀사 호의 뗏목〉을 보고 강한 영향을 받음. 쿠르베 출생.
1820년(22세) 룰 루르 지방에 사는 형 집에 갔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라 보와크스에서 정양.
1821년(23세) 제리코의 소개로 〈사클레크르의 성모〉를 의뢰받음. 이때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음.
1822년(24세)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를 살롱에 출품, 센세이션을 일으켜 마침내 이 작품을 국가에서 매입. 일기를 쓰기 시작. 의형, 베르니나크 사망.
1823년(25세) 누나 집을 떠나 제르망으로 이사. 테리즈 필딩의 아틀리에에서 기거.
1824년(26세) 살롱에 〈키오스섬의 학살〉을 출품했으나 혹평을 받는다. 이때부터 콘스터블 의 영향을 받음.
1825년(27세) 영국 여행. 여기서 보닝턴, 로렌스, 윌키 등과 접촉, 가깝게 지냄. 셰익스피어 연극의 영향을 받음. 파리로 돌아와 아상스에 아틀리에 마련. 다르통 부인과의 교제 시작됨.
1826년(28세) 낭만주의 문학가들과 빈번히 교제. 참사원에 걸 〈법전을 기초하는 유스티니 아누스제〉의뢰받음. 모로 출생.
1827년(29세) 살롱에 12점의 역작을 출품. 그러나, 〈사르다나팔의 죽음〉에 대해서는 악평. 위고와 알게 됨.
1828년(30세) 오르네앙공으로부터 의뢰받은 〈미사를 올리는 리슈류〉를 완성. 괴테의 〈파 우스트〉를 주제로 한 19장의 리도그래프를 제작.
1829년(31세) 또 이사. 동물의 리도그래프를 시도함. 스탕달, 메리메, 듀마 등 문호들과 만 남. 「라 르뷰 드 파리」지에 논문 발표.
1830년(32세) 「라 리뷰 드 파리」지에 라파엘로에 대한 논문 발표.
1831년(33세) 회화·조각 자유 협회에 참가. 살롱에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등 출 품. 레죵 도뇌르 5등 훈장을 받음.
1832년(34세) 모르네 백작을 단장으로 한 외교 사절단의 수행원이 되어 모로코에 감. 탄제 르, 메크네스 등에서 수많은 데상을 그림.
1833년(35세) 브르봉궁의 국왕실 장식을 의뢰받음. 살롱에 〈모르네 백작의 방〉, 〈M.D의 초상〉을 출품. 조르지 상드와 알게 됨.
1834년(36세) 살롱에 〈메크네스의 거리〉, 〈알제의 여인들〉을 출품. 「햄릿」를 주제로 한 리도그래프 제작에 착수.
1835년(37세) 제르망으로 이사. 그로 사망.
1836년(38세) 브르봉궁의 장식 끝냄.
1837년(39세) 〈타유블루의 전투〉를 살롱에 출품.
1838년(40세) 브르봉궁의 도서실 장식을 의뢰받음.
1839년(41세)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 루벤스를 연구.
1840년(42세) 룩셈부르크궁 도서실 장식도 의뢰받음.
1841년(43세) 살롱에 〈돈 주앙의 난파선〉을 출품.
1842년(44세) 로앙에서 쇼팡, 상드와 함께 지냄.
1843년(45세) 괴테의 작품을 주제로 한 리도그래프 제작.
1844년(46세) 사크르망 예배당의 벽화 완성.
1845년(47세) 휴양하기 위해 피레네 오 퐁느에 체재.
1846년(48세) 레죵 도뇌르 4등 훈장을 받음.
1847년(49세) 룩셈부르크, 브르본 양궁 장식 완료.
1848년(50세) 코로의 전람회 평을 「몽드」지에 발표. 샹로제에 체재.
1849년(51세) 성 슐비스 예배당의 벽화를 의뢰받음.
1850년(52세) 루브르 미술관의 장식을 맡음.
1851년(53세) 루브르 미술관의 장식을 완성.
1852년(54세) 전년에 의뢰받은 파리 시청 평화의 방 벽화 제작에 몰두.
1853년(55세) 후원자인 〈브루야스의 초상〉을 그림.
1854년(56세) 파리 시청 평화의 방 벽화 제작 완료. 이 벽화는 파리·코뮌 때 소실되었음. 친우, 피레에 사망.
1855년(57세)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대전람회 개최, 35점을 출품. 보들레르, 고티에 등에게 절찬받음. 레죵 도뇌르 3등 훈장을 받음. 스트라스브르에 체재. 고딕 미술에 매료.
1856년(58세) 아르곤느 지방 여행. 가벼운 병 때문에 성 술비스 예배당 일을 일시 중단.
1857년(59세) 아카데미 데 보자르 회원에 당선됨. 샹로제에서의 정양으로 가벼운 병 완쾌.
플스탄베르 광장 6번지로 이사. 「미의 종류」발표.
1858년(60세) 지병을 고치기 위해 프롱피에르 온천에서 지냄. 병이 좀 나아지자 성 슐비스 예배당의 장식을 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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