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편지 (8) - 베르나르에게
약속대로 붓을 잡아보았다. 우선 이 고장의 맑은 공기와 명쾌한 빛깔의 인상은 일본을 연상케 한다. 물은 아름다운 에머럴드빛의 점무늬를 그리고, 우리가 오글쪼글한 종이의 판화에서 보는 것 같은 풍부한 푸르름을 풍경에 길들인다. 엷은 오렌지 빛의 저녁놀은 흙을 푸르게 느끼게 한다. 매일 태양은 노란빛으로 빛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고장의 여름철의 멋을 전연 모르고 있다. 여자의 옷차림은 아름답고, 특히 일요일의 가로수 길에서는 소박하고 아주 희한한 빛의 조화를 본다. 아마 여름이 되면 더욱 명랑해질 것이다.
이곳의 물가는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비싸서 곤란하다. 퐁 타벤에서 생활했을 무렵과 같지는 않다. 나는 처음에 5프랑씩 매일 지불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4프랑으로 그럭저럭 꾸려나가고 있다. 이곳 사투리를 배워서 브이아베이스나 아이오리를 먹는 연습을 해야 할 것 같다. 그래야만 별로 비싸지 않은 종류의 하숙집을 찾아낼 수 있을 테니까.
거기다 하숙자 수가 늘어난다면 더욱 유리한 조건으로 방 값이 싸질 것이란 확신도 있다. 태양과 색채를 그리워하는 예술가들은 남프랑스로 이주하는 편이 실제로 유리할 지도 모른다. 만일 일본인이 그들의 나라에서 그 예술을 진보시킬 수 없다면 기꺼이 프랑스에서 계속해야만 할 것이다. 이 편지 첫머리에 있는 크로키는 내가 지금 만들어보고자 손을 대고 있는 습작의 하나다. 커다란 황색 태양이 묘한 꼴로 조교(弔橋) 옆면에 부조된 곳을, 선원들이 애인을 데리고 읍내쪽으로 올라간다. 같은 조교와 한 무리의 빨래하는 여자들은 그린 또 한 장의 습작도 있다.
그리고 자네가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앞으로 어디로 갈지를 한마디로 전해주게. 자네에게 마음으로부터의 악수를 보내며, 친구들에게도 안부 전해주기 바라네.
1888년 3월 아를르
고흐의 편지 (9) - 베르나르에게
앞으로 회화가 그러할 것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지만, 현대 미술 그 자체가 동떨어진 개인의 힘을 넘어서, 그리스 조각가나 독일 음악가, 프랑스 소설가들에게 필적할 높은 지위로까지 도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어떤 사람들이 결합하고 공통의 이상을 수행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색채의 멋진 구성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창의가 결여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호소력과 매력이 풍부한 참신한 착상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나, 겁쟁이여서 정해진 팔레트는 바꿀 줄도 모르고 빛깔이 완전히 노래하는 표현을 취하지 않는다.
불행의 크나큰 원인은 예술가들 사이에 단결심이 결여되어 있고 서로 비난을 하거나 박해를 하고,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어떻게든지 출세시키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논의는 시시하다고 자네는 말하고 싶겠지. 좋다! 그러나 새로운 르네상스의 실현은 모두 여기에 달려 있는 것으로, 물론 시시한 것은 아니다. 기술문제에 관한 자네의 의견을 다음 편지에서 알려주기 바란다.
그림물감 가게에서 산 검정과 하양을 마음껏 팔레트 위에 얹고, 그대로 사용할 생각이다. 그것은 -- 일본식의 단순화된 색채를 염두에 두고서인데 -- 봉숭아빛 오솔길이 있는 푸른 공원에서 검정옷을 입은 법관을 만났다고 가정해서이다. 그 신사는 원 바로 위에 단순한 코발트빛 하늘이 있다. 왜 이 법관을 생생한 검정으로 칠하고 그 신문지를 생생한 흰색으로 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
일본인은 재현을 추상화한다. 평면적인 색채를 병렬시키고, 움직임이나 모양을 독특한 선으로 잡는다.
이것과는 다른 의도가 되는 것으로서, 예를 들어 저녁의 노란 하늘을 나타내기에 적합한 모티브를 조립하고, 굳은 하얀 벽이 가진 본래의 하양과 하늘을 대조시켜 엄격하게 표현한다. 이상한 방법으로, 본래의 하양을 중화된 하늘의 엷은 보랏빛으로 억누르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토록 간소한 풍경은 이치에 들어맞아, 석회로 새하얗게 칠한 오두막이 똑똑히 오렌지빛 지면 위에 세워져 있다. 그것에 따라서도 남방의 하늘과 지중해의 파랑은 상태가 제일 높은 파랑의 조화이므로 그 비례의 강도에 따른 오렌지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문이나 창의 검정, 지붕 꼭대기에 있는 작은 십자가, 그와 같은 검정과 하양과의 대조는 파랑과 귤빛과 마찬가지고 눈에 유쾌하다.
더욱 재미있는 재료는, 예를 들어 검정과 하양의 체크무늬 옷을 입은 여자를 푸른 하늘과 오렌지빛 지면의 단순한 경치 속에 두면 틀림없이 색다를 것이라 생각된다. 마침 아를르에서는 하양과 검정의 체크무늬 옷을 종종 볼 수 있다.
검정과 하양도 빛깔인 이상 대개의 경우, 색채로서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고, 그 조합은 초록과 빨강과 마찬가지로 자극적이기도 하다.
일본인도 이 방법을 쓰고 있다. 그리고 윤기가 없는 창백한 아가씨의 얼굴을 검은 머리와 흰 종이의 강렬한 대비와 네 개의 필선(筆線)으로 참으로 훌륭히 나타내고 있다. 예의 수없는 흰 꽃을 별과 같이 달고 있는 검은 가시가 있는 관목(灌木)은 말한 나위도 없지만.
비로소 지중해를 보았다. 아마 자네가 먼저 그곳을 건너겠지. 한 주일 동안 생트 마리에서 지냈는데, 치마부에나 지오토를 연상케 하는 아가씨가 있었다. 몸이 가늘고 곧으며 좀 슬퍼 보이는 신비로운 아가씨였다. 평탄하고 작은 모래의 바닷가에 있는 초록, 빨강, 파랑의 작은 배는 모양과 빛깔이 아주 아름다워서 꽃을 생각나게 한다. 여기에는 한사람만 타고, 절대로 앞바다로는 나가지 않는다. 바람이 없을 때에만 나가서 조금만 심해지면 곧 돌아오는 것이다.
언제나 잘 앓는 고갱은 또 아픈 모양이다.
최근의 자네 일을 알고 싶다. 이쪽은 여전히 풍경뿐이다. 밑그림을 동봉한다. 나 역시 아프리카를 보고 싶다. 미래의 계획을 세워보았으나 가능성도 보이지 않고, 될 대로 되라지. 알고 싶은 것은 하늘의 가장 강한 파랑의 효과이다. 프로망탱과 제롬과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은 남프랑스의 지면에는 빛깔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마른 모래를 손에 들고 가까이서 본다면, 물이나 공기와 같은 방법으로 관찰한다면 틀림없이 빛깔이 없을 것이다. 노랑이나 오렌지 빛깔이 없는 파랑은 생각할 수 없다. 자네가 만일 파랑을 사용할 때에는 노랑이나 귤빛도 사용하는 것이 좋으리라. 설마 자네는 내가 부질없는 이야기만 쓰고 있다고 말하지는 않겠지.
자네 일만을 생각하고 악수를 보낸다.
1888년 6월 하순
약속대로 붓을 잡아보았다. 우선 이 고장의 맑은 공기와 명쾌한 빛깔의 인상은 일본을 연상케 한다. 물은 아름다운 에머럴드빛의 점무늬를 그리고, 우리가 오글쪼글한 종이의 판화에서 보는 것 같은 풍부한 푸르름을 풍경에 길들인다. 엷은 오렌지 빛의 저녁놀은 흙을 푸르게 느끼게 한다. 매일 태양은 노란빛으로 빛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고장의 여름철의 멋을 전연 모르고 있다. 여자의 옷차림은 아름답고, 특히 일요일의 가로수 길에서는 소박하고 아주 희한한 빛의 조화를 본다. 아마 여름이 되면 더욱 명랑해질 것이다.
이곳의 물가는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비싸서 곤란하다. 퐁 타벤에서 생활했을 무렵과 같지는 않다. 나는 처음에 5프랑씩 매일 지불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4프랑으로 그럭저럭 꾸려나가고 있다. 이곳 사투리를 배워서 브이아베이스나 아이오리를 먹는 연습을 해야 할 것 같다. 그래야만 별로 비싸지 않은 종류의 하숙집을 찾아낼 수 있을 테니까.
거기다 하숙자 수가 늘어난다면 더욱 유리한 조건으로 방 값이 싸질 것이란 확신도 있다. 태양과 색채를 그리워하는 예술가들은 남프랑스로 이주하는 편이 실제로 유리할 지도 모른다. 만일 일본인이 그들의 나라에서 그 예술을 진보시킬 수 없다면 기꺼이 프랑스에서 계속해야만 할 것이다. 이 편지 첫머리에 있는 크로키는 내가 지금 만들어보고자 손을 대고 있는 습작의 하나다. 커다란 황색 태양이 묘한 꼴로 조교(弔橋) 옆면에 부조된 곳을, 선원들이 애인을 데리고 읍내쪽으로 올라간다. 같은 조교와 한 무리의 빨래하는 여자들은 그린 또 한 장의 습작도 있다.
그리고 자네가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앞으로 어디로 갈지를 한마디로 전해주게. 자네에게 마음으로부터의 악수를 보내며, 친구들에게도 안부 전해주기 바라네.
1888년 3월 아를르
고흐의 편지 (9) - 베르나르에게
앞으로 회화가 그러할 것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지만, 현대 미술 그 자체가 동떨어진 개인의 힘을 넘어서, 그리스 조각가나 독일 음악가, 프랑스 소설가들에게 필적할 높은 지위로까지 도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어떤 사람들이 결합하고 공통의 이상을 수행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색채의 멋진 구성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창의가 결여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호소력과 매력이 풍부한 참신한 착상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나, 겁쟁이여서 정해진 팔레트는 바꿀 줄도 모르고 빛깔이 완전히 노래하는 표현을 취하지 않는다.
불행의 크나큰 원인은 예술가들 사이에 단결심이 결여되어 있고 서로 비난을 하거나 박해를 하고,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어떻게든지 출세시키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논의는 시시하다고 자네는 말하고 싶겠지. 좋다! 그러나 새로운 르네상스의 실현은 모두 여기에 달려 있는 것으로, 물론 시시한 것은 아니다. 기술문제에 관한 자네의 의견을 다음 편지에서 알려주기 바란다.
그림물감 가게에서 산 검정과 하양을 마음껏 팔레트 위에 얹고, 그대로 사용할 생각이다. 그것은 -- 일본식의 단순화된 색채를 염두에 두고서인데 -- 봉숭아빛 오솔길이 있는 푸른 공원에서 검정옷을 입은 법관을 만났다고 가정해서이다. 그 신사는 원 바로 위에 단순한 코발트빛 하늘이 있다. 왜 이 법관을 생생한 검정으로 칠하고 그 신문지를 생생한 흰색으로 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
일본인은 재현을 추상화한다. 평면적인 색채를 병렬시키고, 움직임이나 모양을 독특한 선으로 잡는다.
이것과는 다른 의도가 되는 것으로서, 예를 들어 저녁의 노란 하늘을 나타내기에 적합한 모티브를 조립하고, 굳은 하얀 벽이 가진 본래의 하양과 하늘을 대조시켜 엄격하게 표현한다. 이상한 방법으로, 본래의 하양을 중화된 하늘의 엷은 보랏빛으로 억누르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토록 간소한 풍경은 이치에 들어맞아, 석회로 새하얗게 칠한 오두막이 똑똑히 오렌지빛 지면 위에 세워져 있다. 그것에 따라서도 남방의 하늘과 지중해의 파랑은 상태가 제일 높은 파랑의 조화이므로 그 비례의 강도에 따른 오렌지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문이나 창의 검정, 지붕 꼭대기에 있는 작은 십자가, 그와 같은 검정과 하양과의 대조는 파랑과 귤빛과 마찬가지고 눈에 유쾌하다.
더욱 재미있는 재료는, 예를 들어 검정과 하양의 체크무늬 옷을 입은 여자를 푸른 하늘과 오렌지빛 지면의 단순한 경치 속에 두면 틀림없이 색다를 것이라 생각된다. 마침 아를르에서는 하양과 검정의 체크무늬 옷을 종종 볼 수 있다.
검정과 하양도 빛깔인 이상 대개의 경우, 색채로서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고, 그 조합은 초록과 빨강과 마찬가지로 자극적이기도 하다.
일본인도 이 방법을 쓰고 있다. 그리고 윤기가 없는 창백한 아가씨의 얼굴을 검은 머리와 흰 종이의 강렬한 대비와 네 개의 필선(筆線)으로 참으로 훌륭히 나타내고 있다. 예의 수없는 흰 꽃을 별과 같이 달고 있는 검은 가시가 있는 관목(灌木)은 말한 나위도 없지만.
비로소 지중해를 보았다. 아마 자네가 먼저 그곳을 건너겠지. 한 주일 동안 생트 마리에서 지냈는데, 치마부에나 지오토를 연상케 하는 아가씨가 있었다. 몸이 가늘고 곧으며 좀 슬퍼 보이는 신비로운 아가씨였다. 평탄하고 작은 모래의 바닷가에 있는 초록, 빨강, 파랑의 작은 배는 모양과 빛깔이 아주 아름다워서 꽃을 생각나게 한다. 여기에는 한사람만 타고, 절대로 앞바다로는 나가지 않는다. 바람이 없을 때에만 나가서 조금만 심해지면 곧 돌아오는 것이다.
언제나 잘 앓는 고갱은 또 아픈 모양이다.
최근의 자네 일을 알고 싶다. 이쪽은 여전히 풍경뿐이다. 밑그림을 동봉한다. 나 역시 아프리카를 보고 싶다. 미래의 계획을 세워보았으나 가능성도 보이지 않고, 될 대로 되라지. 알고 싶은 것은 하늘의 가장 강한 파랑의 효과이다. 프로망탱과 제롬과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은 남프랑스의 지면에는 빛깔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마른 모래를 손에 들고 가까이서 본다면, 물이나 공기와 같은 방법으로 관찰한다면 틀림없이 빛깔이 없을 것이다. 노랑이나 오렌지 빛깔이 없는 파랑은 생각할 수 없다. 자네가 만일 파랑을 사용할 때에는 노랑이나 귤빛도 사용하는 것이 좋으리라. 설마 자네는 내가 부질없는 이야기만 쓰고 있다고 말하지는 않겠지.
자네 일만을 생각하고 악수를 보낸다.
1888년 6월 하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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