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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명화

마돈나 '여자의 사랑은 육체적인 것이 아닌 정신 적인 죽음과 동등시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듯이 뭉크에게 있어서 여자의 헌신적인 사랑이란 수태(受胎)하여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이러한 바탕을 발전시킨 모티브가 이다. 작품에서 보여지듯이 마돈나 상(像)을 둘러싸고 정충을 그렸으며 왼쪽 아랫부분 구석에는 뼈만 앙상한 태아가 웅크리고 있다. 풍만한 육체에 자유 분방한 머리카락의 곡선의 의미, 여기에서 사랑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때마저, 죽음에 대하여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 사랑과 죽음은 서로 공존하며 동시에 나타나고 여자는 남자뿐만 아니라 자신까지도 위험케 하는 죽음에 지배되는 동물로서 표현되어지고 있다. 이 '사랑'의 연작은 확대되어 '이것은 사랑과 죽음에 관한 것이다.' 라고 .. 더보기
사춘기 뭉크는 소녀의 모습을 통하여 성(性)에 눈 뜬 청춘기의 첫 반응의 특징인 성적인 자 기 암시와 또 한편으로는 움츠러드는 애틋 하면서도 청순한 사춘기 소녀를 표현하려 했다. 이 모티브는 뭉크가 여러 가지 방법 에 의한 작품에서 선택하여 등장시키고 있다. 유화로 처음 제작한 것은 1886년인데, 1890년 공교롭게도 불에 타 없어지므로 해서 다시 이 작품을 제작하였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뭉크의 여성 초상화나 또 일반적인 여성을 표현한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여성 내면을 감추려는 듯 손을 앞에 가지런히 놓고 있는 것이다. 여기 이 작품에서 표현되어진 소녀는 사춘기 특유의 감수성이 강한 동경과 불안이 혼합되어 진 내면 세계를 풍부하게 나타내고 있다.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는 얼굴과 불안을 상 징한 듯한 그.. 더보기
절규-판화 뭉크는 판화를 회화 못지않게 중시하였으며 회화만큼 판화 작품을 많이 제작하였다. 유화에서의 테마를 판화로 옮기기도 하였으며, 제목을 바꾸기도 하고, 석판이나 목판으로 변화시켜 표현하였다. 뭉크는 판화의 기법적인 면에 여러 가지 혁신을 가져다 주었는데, 동일한 작품 속에 몇 가지 기법의 판종을 병용하기도 하고, 합성 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혁신을 실행하였다. 1895년부터 1897년까지 파리에 머무는 동안 판화에 대한 기술을 크게 연마하였는데, 이 작품도 이 때 제작되어진 석판화로서 부드러운 모필(毛筆)에 의한 풍요로운 곡선은 장식적인 윤곽을 지니는 한편, 동세에 의한 조형적 화면 구성은 긴장된 가운데 현대인의 불안한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하여 주고 있다. 유화에서와 같이 동일한 구도를 채택하였는데 석판.. 더보기
그랑 카페의 입센 뭉크 Edvard Munch(1863~1944) ----------------------------- 이 작품을 그린 1906년(43세)에 베를린에 서 공연한 입센의 '유령', '헤다 가블러' 를 위한 무대 장치의 밑그림을 제작하였다. 당시 32세이던 1895년 오슬로의 브롬 쿠비스트 화랑에서 개인전이 개최되었는데 이때에 보이콧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논란의 대상이 된 후 전시 일주일 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이 때 개인전을 방문한 입센의 지지와 격려를 얻게 된다. '이러한 작업은 내게는 매우 즐겁군, 나를 믿게. 사태는 내 편을 든 것과 같이 틀림없이 자네 편을 들게 될거야. 적이 많을수록 친구도 많은 법이라네.'하고 입센은 격려를하여 주었는데, 이 때 뭉크의 마음에 강한 용기를 갖게 하였다. 전체의 구성이.. 더보기
적회색 물병에 그려진 헤라클라스의 12가지 시험중 한 장면 B.C 530 -25년경 애투루리아 유적지에서 발굴 더보기
크레타미술 에게 해는 크레타 섬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만이며, 에게 미술은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생성된 미노스 문명의 해양 미술 문화이다. 그들은 배를 타고 다니며 경제활동을 하였고, 따라서 사치를 좋아하고 쾌락적이었다. 이 습성이 미술에도 반영되었는 데, 대표적으로 투우사의 프레스코 라는 작품이 미노스의 궁전에서 발견되었다. 미노스 문명이 그리스 영토의 미케네에 영향을 미쳐 생성된 것이 미케네 문명이다. 미케네의 궁전은 미노스와는 달리 요새화 되어 있으며 견고한 벽면과 큰 돌로 축조되어 있다. 미케네의 사자문은 이러한 양식을 극명히 나타내고 있는 건축물로, 상부에 입구를 지키는 거대한 돌로 된 두 마리의 사자 부조가 새겨져 있다. 더보기
성마태오 더보기
카타콤벽화 4세기(311)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기에 이르렀고 이는 미술에 있어서도 혁신적인 계기를 만들어 이곳저곳에 거대한 성당이 세워지고 이에 따라 광대한 벽면에 그릴 그림의 필요성이 대두되게 된다. 이에 비해 카타콤은 상대적으로 너무 소박한 그림이었고, 이는 고도로 훈련된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계기를 창출하게 되었다. 바로 이들이 초기 그리스도교의 벼면 모자이크를 만들어낸 장본인들이었다. 이것이 주는 효과는 여지껏 카타콤이 주는 초라함을 한층 웅장함으로 변모시키는 것이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