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 형상을 통하여 요추(要樞)한 인간과 소외
2001. 1. 17 ∼ 1. 30 / 인사 갤러리기획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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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준 조각의 기저에는 그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형상화 해온 사물의 가치와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갖는 존재론적 위상에 관한 그의 생각이 녹아 있다. 그것은 먼 과거에 대한 의식과 부조리한 현재,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작가 나름의 명상이 하나의 시·공간에서 상충적으로 교차하는 가운데 얻어진 의식과 무의식의 결정체이다. 그것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범부(凡夫)들이 겪어야하는 소외, 박탈, 상실 등 철학적 문제뿐 아니라 그의 작품자체가 갖고 있는 사회·환경적 의미가 포함된다. 그리고 그는 늘 조각가 입장에서 조각의 존재가치와 그의 작품이 주변에 끼치는 파장, 그리고 이의 형식적 가치는 무엇인가에 대한 자문자답을 통하여 표현 영역을 결정한다. 그것은 조각의 존재론적 위상에서부터, 공간차지, 개념, 매체, 조형요소와 작가의 기술적인 문제 등 조각과 관련된 모든 의미를 포괄하는 것이다. 10여년전 대학을 졸업하고 홀연히 미국으로 떠날 때 그의 마음속에는 데이빗 스미스(David Smith)나 시어도 로작(Theodore Roszak)같은 거장들을 배우겠다는 것보다는 미국 모더니즘 조각이 갖는 힘과 확장된 매체가 갖는 다양성을 그의 조각에 도입하고자 하는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우리민족과 친숙한 조형물들, 이를테면 솟대, 장승, 벅수같은 형상들을 '의인화'하여 모더니즘의 문맥으로 재해석하고 여기에 국제적 보편성과 역동성을 부여함으로써 표현의 폭을 확장시키겠다는 젊은 미술학도의 야심찬 포부가 담긴 결행이기도 하였다. 아울러 거기에는 단순히 '사유하는 실체'로뿐 아니라 존재 자체로써 의미를 가지는 '인간'이라는 화두가 작품의 주된 내용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인간이라는 것은 겉으로 화려하나 속은 병들어 있는 말기 자본주의 사회를 헤쳐가느라 자신을 돌볼 겨를도 없이 예속화되어 살아가는 고독한 인간상,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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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미국 유학 시 그는 이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그 중에는 <인간>, <가족>, <사회적 개혁>과 같이 근·현대 미국에서 활동한 조각가들[이를테면 세이모어 립턴(Seymour Lipton), 이사무 노구치(Isamu Noguchi)등]의 작품에서 빚을 진 듯한 구성조각들이 눈에 띄나 그 중에 주목되는 것이 <사회적 격리>라는 일련의 소품들이다. 이는 여러 개념적이고 문학적인 형상들이 서사성을 띠고 조립되어 얼핏보아 하나의 자연물을 연상시키나, 작가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우리가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가는 모습'을 작품으로 표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작품 뒤쪽에 있는 '벽'과 같은 형상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의 벽을 의미하며, 그 앞쪽에 있는 구부러져 뱀과 같은 형상과 삼지창과 같은 형상은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을 나타낸다." 이렇게 암시적인 내용도 중요하지만 이 작품들이 갖는 중요한 가치는 대담하면서도 우아한 형식미이다. 그리고 이 같은 우아함은 끝이 뾰족하고 공격적인 형태가 벽을 의미하는 판형 또는 방형(方形)의 구조물과 긴장감을 조성하면서 공격성이 완화되어 다양한 의미들을 재생산함으로써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귀국 후 그는 한동안 목조각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조각도로 거칠게 마무리하여 생명력이 풍부해 보이는 골격을 중심으로 김낙준 특유의 풍부한 형식언어들을 접합시킨 <인간, 그리고 내면과 외면>이라는 일련의 작품들은 단순성과 다양성이 한 작품에 공존하는 '다양 속의 통일'이라는 고전적 공리를 연상시킨다. 조각이라는 베틀에서 인간의 내면과 외면의 씨줄과 날줄을 풀고 엮으면서 이들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빛'이 필요하다. 그리고 어떤 의도에서 창조된 조각이든 간에 놓여진 그 장소에 떨어지는 빛의 지배를 받게 되어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작품에 빛을 비추어 생긴 그림자는 인간의 내면을 의미하며, 작품 그 자체는 인간의 외면을 상징한다. 인간이 주변 환경에 따라 성향이 변하듯이 작품에 투영되는 빛의 위치와 그 강도에 따라 그림자의 형태 즉 작품이 전달하려는 의미도 변화하게되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그는 인간의 부초와 같은 덧없음과 나약함 그리고 이중성을 표현하고 있다. 이를 볼 때 빛은 그의 작품을 작품으로 규정할 뿐 아니라 작품의 일부로써 그 자체가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그는 빛의 충격을 미리 예견하고 작품에 떨어질 빛의 효과를 이용하고자 하는 선험적 자각을 보여준 셈이다. 1995년 이후 그는 한동안 작품 재료로 알루미늄, 동판 그리고 리벳을 이용하여 이전의 작품 보다 더욱 더 절제된 인간의 형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때 그는 알루미늄판과 동판을 절단·절곡하여 붙일 때 용접의 단순함을 피하기 위하여 리벳을 이용함으로써 자칫 미니멀(minimal)해 보일 수 있는 작품에 변화를 유도하고 작가의 장인정신을 부각시킨다. 특히 알루미늄이라는 재료에서 오는 단조로움과 차가움 그리고 표면의 광택을 소거시키고자 샌드페이퍼, 페인트 그리고 샌드블래스터(sandblaster)를 이용하고, 작품 표면에는 동판과 페인트를 칠한 알루미늄을 붙여 장식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점은 김낙준이 어떤 미술적 사조나 흐름에서 자유롭게 일탈(逸脫)하여 그 나름의 작업세계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무장되었음을 시사한다. 지난 98년 4번째 개인전에서도 그는 일관되게 '인간'이라는 대상에 천착했다. 이때는 인간의 모습을 예전보다 더욱 질서 있고 단순화된 형상으로 변주하고 대신 환경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주변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도록 작품의 크기나 내구성, 심지어는 색채에까지 세심한 배려를 했음을 볼 수 있다. 3m에서 10m에 이르는 철제 구성조각들은 한 작가의 개인전에 출품된 것으로서의 그 규모도 예사롭지 않지만 작품 상단부에 스테인레스 모빌을 설치하여 공간과의 조화뿐 아니라 시간적 개념까지 도입한 점이 눈에 띤다. 이는 구미 모더니즘조각에 기초한 순수한 조형요소가 그가 설정한 체계화된 질서 속에 육화(肉化)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 같은 그의 노력은 물리적 체계들 내부에 존재하는 근원적 질서를 요추(要樞)하려는 긴장과도 비교되며, 역으로 말하면 그 같은 물리적 체계들의 핵심으로부터 그의 노력이 비롯되는 것인지 모른다. 3
한편 이번 개인전에서 김낙준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솟대라는 한국 전통의 소재를 통하여 나타낸 현대사회에서의 인간의 소외와 고독이다. 그 솟대라는 대상은 우리 민족이 과거급제와 같은 경사가 있을 때 마을 어귀에 세워두던 상징물로써 매우 상서로운 징표이다. 그러나 그의 관심사는 이러한 의미보다는 잊혀져 가는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의 표명과 계몽이다. 아울러 면(面)에서 선(線)으로 옮아가는 그의 조형적 관심을 충족시키기에 가장 적합한 대상이기도 하다. 결국 큰 맥락에서 이번 전시회 역시 그간의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작품은 전통과 현대, 동적인 것과 정적인 것, 단순성과 복잡성 등 여러 상충되는 개념들이 상호보완적으로 공존하는 독특한 질서체계를 보여준다. 주지하다시피 김낙준을 끊임없이 사유케 만든 형식언어가 점·선·면이다. 그간 그의 작업은 면을 주조(主調)로 한 내부형(內部形)과 구조형(構造形) 그리고 시각형(視覺形)의 문제를 다양한 매체와 기법, 색채를 사용하여 시각화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근자에 이르러 그는 형상언어를 면에서 선으로 바꾸어 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말하자면 그의 표현 이미지는 면에서 선으로 선에서 점으로 역행하는 셈이 된다. 이때의 선은 대상의 윤곽선으로서의 선이라기보다는 형태를 내부로부터 규정할 뿐 아니라 선 자체로서 형태를 결정하는 대상으로서의 선이다. 말하자면 자코메티의 현대적 변용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김낙준은 작품제작에 있어 모델링보다는 절단, 절곡(折曲), 용접을 통하여 보다 다이나믹하고 자연스런 형태를 지향한다. 이 점은 철조각에 천착하는 대다수의 작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는 통쇠를 이용함으로써 작품에 생경한 아름다움을 줄 뿐 아니라 철재가 지닌 고유한 색감마저도 차용하는 여유로움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점이 최근에 이르러 그의 작품에서 가장 뚜렷이 간취(看取) 할 수 있는 변화의 조짐이다. 아울러 이전의 다채로운 형식언어들을 폐기하고 추상적이고 함축된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그가 어떤 방식으로 선에서 점으로 전이해나갈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시킨다. 이렇게 일관된 내용을 고집하면서도 고정된 형식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양면성은 그의 체질이자 작가정신의 일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그의 작업을 대하다보면 어느덧 '무엇'을 표현했는가의 문제보다는 '어떻게'표현했는가의 문제가 주된 관심으로 떠오르게 됨은 조각가로서의 그의 장인적 기질이 남다르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이경모/미술평론가